배상
전환기적 정의와 원상회복  
Der Vorsitzende der südafrikanischen Wahrheitskommission, Erzbischof Desmond Tutu (r), überreicht am 29.10.1998 in Pretoria das Abschlussdokument der Wahrheitskommission an Südafrikas Präsident Nelson Mandela. Copyright: picture-alliance / dpa

„전환기적 정의“란 무엇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위원회 위원장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우)가 1998년10월 29일 프레토리아에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 진실위원회의 종결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저작권: picture-alliance / dpa전환기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란 개념은 독재와 전제정치에서 민주주의 시민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무력과 인권 침해의 결과를 청산하는 노력을 나타낸다. 이때 전환기적 정의는 적대적인 사회 집단들의 장기적 화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이고 평화로운 정세 확립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된다. 전환기적 정의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네 가지 주요 도구이다. 첫째로 인권 침해를 저지른 죄인에 대한 재판, 둘째로 이른바 진실 위원회에 의한 이런 범죄의 역사적 규명, 셋째로 인권 침해 피해자를 위한 물질적, 상징적 배상, 넷째로 책임자들의 직위 해제를 위한 제도적 개혁이 그것이다. 전환기적 정의는 국가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에서, 또 혼합된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전환기적 정의의 확산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국제군사재판에 의해 나치 정권의 수뇌부를 상대로 실시된 뉘른베르크 재판이 전환기적 정의의 선례로 여겨진다. 승전 연합국4개국에서만 재판관을 세웠다는 상황이 독일 국민이 뉘른베르크 재판을 용인하는 것을 힘들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도쿄에서 실시된 일본 군사 수뇌부에 대한 재판을 보면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체제 붕괴 후에 사회 내부의 화해를 핵심 목표로 하는 전환기적 정의를 위한 모든 노력이 지니는 근본적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 문제점이란 이런 목표의 달성이 그런 조치들에 대한 사회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대단히 어려워지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전환기적 정의는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라서 특히 더 그러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죄인들의 처벌을 목표로 하는 전환기적 정의라는 구상이 군사 정권에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여러 번 적용되었다. 특히 그리스(1975년)와 아르헨티나(1983년)가 그 대표적 예였다. 이후 전환기적 정의라는 구상은 무엇보다도 전세계적으로 독재체제의 붕괴가 잇따랐던 1980년대 말부터 대단히 약진했다. 당시 전환기적 정의는 민주화의 중심 도구로 간주되었다. 인권을 침해한 죄인의 형사 소추라는 이미 발전된 도구 외에 앞에서 언급한 다른 도구들, 즉 진실 위원회, 기관들의 철저한 규명, 특히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도 점차 중요성이 커져 갔다. 이 모든 것이 인권이 보편적 척도로 대두했다는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전환기적 정의의 예와 모범으로서의 독일의 원상회복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처음부터 전환기적 정의의 모든 도구가 투입되었다. 단지 진실 위원회만이 예외로서, 이것은 몇 십 년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 화해의 수단으로 확산되었다. 진실 위원회는 대개 과거 가해자의 형사 소추의 대안으로 쓰인다. 가령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주의)정권의 붕괴 후에 남아프리카에서 그랬듯이, 추구하는 화해가 구 정치 세력과 신 정치 세력 간의 힘든 타협이 이루어져야 가능할 때 조직되었다. 1945년 이후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이 완전한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에 그런 고려가 불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전환기적 정의와 관련된 모든 조치는 처음에 연합군 승전국들로부터 나왔다.

특별전시회 ‘부헨발트의 잊혀진 여인들’, 바이마르 근방의 부헨발트, 과거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옛 수용자용 식당
저작권: picture-alliance / dpa나치 정권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이른바 원상회복(Wiedergutmachung)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1945년 이후 독일측에서도 나치 피박해자들에 대한 배상안을 마련하긴 했지만, 서방 연합국, 특히 미국의 요구는 이를 훨씬 상회했다. 그래서 1949년 서독이 건국되기도 전에 이미 복잡한 물질적 배상 제도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지금까지 600억 유로가 넘는 금액이 이 용도로 지출되었다. 공정한 원상회복 시행은 서방 연합국들에게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서독 민주주의의 중요한 시금석으로 여겨졌다.

원상회복의 첫번째 주요 기둥은 강탈당하거나 몰수당한 재산의 반환이었다. 이는 주로 유대인에게 해당되었다. 두 번째로는 개인적 피해에 대한 배상이 있었다. 원상회복의 세 번째 기둥으로 1952년 이스라엘 및 유대인 청구협회(Jewish Claims Conference)와 체결한 제3제국의 박해를 당한 유대인을 위한 집단 배상에 관한 협정이 발효되었다. 이 모든 조치들이 원칙적으로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나치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과거 또는 현재의 독일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독일의 나치 피해자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 집단이었던 반면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나치주의자들의 인권 경시 조치들의 표적이 되었던 독일제국 국경 바깥의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로 눈을 돌리면 그 규모는 가히 폭발적으로 커졌다. 특히 유럽에서 적어도 19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 약 36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전쟁의 와중에 „보통의“ 전쟁 행위와 나치 테러 사이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졌던 까닭에 더욱 더 그랬다.

수십 년이 흐르면서 외국의 피박해자를 배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럼으로써 처음에 나치 피박해자에 대한 배상과 관례적인 전쟁 피해 배상금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서독은 12개 서방 국가와 이 나라 출신의 나치 피박해자를 위한 전반적인 배상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철의 장막 뒤에 있는 피해자들은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배상에서 제외되었다.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된 후에야 비로소 양상이 달라졌다. 지난 몇 년 동안 마침내 동유럽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과거 독일 군수산업의 강제노동자들이 소액이나마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결론

프랑크푸르트 유대인청구협회. 고소인이 강제노동자 기금으로부터 돈을 받아내고 있다. 
저작권: picture-alliance / dpa독일로부터 배상을 받은 이들 중 대부분, 또 배상을 받지 못한 이들 중 대부분도 1945년 이후에는 해외에서 살았다. 게다가 배상 급부의 대부분이 전후 나치 독재에서 연방공화국 체제의 민주주의로의 이행기가 종료되고 한참 뒤에 비로소 실행되었다. 따라서 원상회복은 전환기적 정의의 고전적인 도식에서 벗어난다. 그런 만큼 독일의 나치 피박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서독 민주화의 도구로 여길 수 없다. 오히려 원상회복은 실행력 있는 연합국의 조력 하에 이루어진 자유 민주주의 시민사회로의 성공적인 변환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의 나치 피박해자 배상 사례는 역사적 부당행위의 피해를 배상하는 노력을 위한 기준으로 쓰였다. 이는 2002년 발효된 국제형사재판소의 지위에 대한 규정에까지 여파를 미친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가해자의 처벌 외에 피해자에 대한 배상도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독일의 전후 피해 배상이 훨씬 이전에 일어난 부당행위의 배상 요구를 위한 전례가 되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가령 현재 주로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노예제에 대한 배상금 요구가 여기에 속한다. 물론 이 경우는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의 전환기에서 더 이상 장기적인 화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요구들은 오히려 역사적 인권 침해의 결과로 여겨지는 제도적 부당행위에 대한 투쟁에 해당된다.

그럼으로써 인권 침해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제한된 전환기 동안에만 통용되고 상이한 두 정치체제 사이의 흔히 예민한 전환의 충격을 완화해야 하는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배상은 역사적 인권 침해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 장기적 갈등의 극복 도구로서 더 많이 이용된다.


저자: 콘스탄틴 고쉴러 교수
콘스탄틴 고쉴러는 보훔의 루르 대학교 근현대사 교수이다.

저작권: 콘스탄틴 고쉴러 교수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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