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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관한 모든 것
“네 마음 속의 하모니를 적어보라”

빈 오페라 극장에 선 베토벤
1808년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6번이 처음으로 울려퍼졌다. | 일러스트: © Kitty Kahane

베토벤은 정말 자신이 직접 보수협상을 했을까? 여인들과는 어땠을까? 그림을 통해 베토벤에 대해 알아가보자.

본 태생

베토벤과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 삽화: @Kitty Kahane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770년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본은 1780년부터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는 교육과 문화를 진흥시킨 관대한 대공이었다. 그래서 본은 중요한 문화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년 베토벤

 

소년 베토벤 삽화: © Kitty Kahane “네 살 때부터 음악은 나의 최고 관심사가 되었다. 음악은 종종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해보라! 네 마음 속의 하모니를 적어보라!’” (1783년, 13세의 베토벤이 쾰른의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쓴 편지)

음악의 행로

음악의 행로 삽화: © Kitty Kahane

젊은 시절 베토벤은 본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고,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로부터 피아노와 작곡 수업을 받았다. 1787년에는 막시밀리안 대공이 베토벤의 첫 빈 여행을 성사시켰다. 이 여행에서 베토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만나 음악 교류를 나눴다고 한다.

하이든과의 갈등

하이든과의 갈등 삽화: © Kitty Kahane

1794년 베토벤은 동생 카스파 칼과 함께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빈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요제프 하이든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하이든은 베토벤의 음악을 “너무 복잡하다!”고 표현했다. 쉽지 않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시대의 작곡가

시대의 작곡가 삽화: © Kitty Kahane

1808년 12월 22일 베토벤 생애 가장 중요한 연주회가 열렸다. 차디찬 겨울, 난방도 안 되는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6번이 처음으로 울려퍼졌고, 베토벤은 빈 고전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떠올랐다.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삽화: © Kitty Kahane

베토벤은 부유층 사람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빈 안에서만 50번 넘게 거처를 옮겼는데, 주로 후원자들의 대저택에 있는 작은 서재에서 살았다. 한번은 자신의 보수를 두고 직접 협상을 하던 악보출판사에게 “나는 독립적인 삶이 좋다!”라는 글귀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다사다난한 삶을 살며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의 전형이 되었다.

베토벤과 여인들

베토벤과 여인들 삽화: © Kitty Kahane

연인과 한번도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간 적이 없는 베토벤은 1812년 그 유명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 연인이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추측이 난무하다.

사랑하는 조카 칼

사랑하는 조카 칼 삽화: © Kitty Kahane

“매일의 일상이 나를 지치게 해!”라고 베토벤은 사랑하는 조카 칼에게 썼다. 베토벤은 기필코 칼의 양아버지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제수와의 치열한 다툼 끝에 베토벤이 지고 말았다. 그가 인생에서 맛본 가장 큰 패배였을 것이다.

눈과 귀가 멀다

눈과 귀가 멀다 삽화: © Kitty Kahane

1824년에 초연된 대작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귀가 멀었을 뿐 아니라 시력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음악은 머릿속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명예묘

명예묘 삽화: © Kitty Kahane

많은 질병과의 사투 끝에 57세의 나이로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빈의 배링묘지로 호송하기 위해 2만 명의 사람들이 왔다고 한다. 프란츠 그릴파르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시간을 기억하고 생각하라. 우리는 그가 묻힐 때 함께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눈물을 흘렸다!” 1888년 베토벤의 주검은 빈 중앙묘지에 있는 큰 명예묘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