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의 동쪽과 서쪽에 단풍이 드는 동안 동독에서 평화혁명이 일어나고, 일 년 후 독일은 통일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1989년의 가을은 실제 어떤 느낌이었을까? 월요 집회에서 시작해 관광객들에게 장벽 조각을 팔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다른 한편 서베를린 주민들은 장벽을 캔버스로 삼고 스프레이칠을 한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도시를 갈라 놓은 회색 콘크리트 벽에 서베를린의 생활을 그래피티 아트로 표현한다. 네 개의 언어로 쓰여진 표지판들이 장벽을 따라 눈 위에 쓰러져 있다. 이 표지판들은 자유의 위험성을 알리거나 국경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한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국경선을 넘는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미국 지역을 벗어납니다”라고 표시되어 있다. 동베를린 쪽에 장벽을 따라 만들어진 절망적인 출입 금지 지역은 동베를린 주민들을 “평화의 경계선”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사람들은 사회주의통일당과 동독 정권을 향해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매월 7일 시위자들이 거리로 나간다. 1989년 5월 7일 지방 선거 조작의 결과로 나타난 98.85%라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압도적 지지율”을 비판하기 위해서다.
매주 월요일 동독 곳곳의 교회에서 평화예배가 이어지면서 이 수치가 실제 동독의 분위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동독 주민들은 월요 집회를 통해 정권에 대한 시위를 이어간다. 예나에서 직접 집회에 참가했던 카타리나 슈타인호이저는 “처음에는 긴장되고 불안한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 국가가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함의 술렁임이 동독의 지배적 분위기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수년 동안 계속된다. “물론 행복한 순간, 사랑에 빠지는 순간, 젊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만세를 외쳐야 했고 그것마저 잘못된 행동일 때가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극심한 절망감이 떠오른다.” “무언가 잘못해서 체포를 당하고 국가에 넘겨질 수 있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일상 생활에 언제나 깔려 있었다. 카타리나 슈타인호이저는 처음으로 참여했던 시위를 회상한다. “라이프치히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한다고 들었을 때 큰 용기를 얻었다.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걸으며 서로의 촛불을 켜주면서 시위자들 사이에서 궐기의 기운이 맴돈다. 사람들은 과거에 시위자들이 어떠한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자신의 직장과 개인 생활에 어떤 파장이 닥칠 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오랜 우울의 시간”을 경험한 시위자들은 거리에서 함께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자유를 느낀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표현하며 정권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카타리나 슈타인호이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장벽이 열릴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본에 사는 친구들이 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들이 다시 떠날 때 기차역에서 그녀의 딸이 “다음 번에는 우리가 갈게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받아친다. “그렇게 빨리 장벽이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자유, 그러니까 여행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동독 사람들이 얼마나 동독의 종말보다 개혁을 바랐는지 설명한다.
“언제부터 유효합니까?” 마치 학생이 칠판 앞으로 나와서 문제를 푸는 듯한 분위기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귄터 샤보브스키(Günther Schabowski)는 적지 않게 당황했고, 누군가 자신에게 귓속말로 답을 속삭여주기를 기대하는 듯 보인다. 결국 그는 “제가 아는 바로는 지금부터 바로 유효합니다”라고 어색하게 대답한다. 이렇게 사회주의통일당의 당수는 의도치 않게 즉각적인 장벽 붕괴를 선포한다. 몇 분 후 독일 제1텔레비전 방송이 국경선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보른홀머 가의 검문소 책임자는 밤 11시30분경 “휩쓸리기 직전이다”라고 보고한 후 최초로 국경선을 완전히 개방한다. 도장 찍는 일이 중단되고, 사람들이 국경선을 넘어간다. “그 때의 해방감과 환호성을 잊을 수 없다. 텔레비전을 통해 그 때의 모습을 보거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베를린 장벽은 수십 년 동안 전차레일을 갈라놓고 가능성, 인간 관계, 도로들을 제약했던 실질적인 건축물이다. 또한 미국과 소련이라는 정치 진영 중에서, 보수적인 소비 정책과 사회주의 억압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냉전을 상징했다. 회색 지대를 허용하지 않고 동서베를린 주민들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질서를 상징했다. 11월 동서베를린의 주민들은 물리적으로도 자유를 얻는다.
동서독의 국경선이었던 장벽 조각 |사진: Andreas Ludwig베를린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이 장벽의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매입해 체계적으로 분해하고 필요한 경우 다시 스프레이를 뿌려 ‘원본 증서’와 함께 판매하는 철거업자에 대해 보도한다. 장벽 기념품 시장이 수 년째 명맥을 이어간다. 요즘에도 박물관 상점에 가면 다양한 출처의 장벽 기념품들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