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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베를린국제영화제 블로거
끝나지 않은 싸움

탈북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윤재호 감독의 ‘파이터’
홀로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 여성 진아(임성미)는 권투에서 열정을 발견하고 프로 권투 선수가 되고자 한다. | 사진(부분): © (주)영화사 해그림

권투를 통해 삶의 동력을 얻는 탈북 여성 진아의 이야기를 담은 윤재호 감독의 ‘파이터’가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에 소개됐다. 차가운 현실 속 자신과 싸움을 마주한 진아를 따라가는 영화의 시선은 사려 깊고 따뜻하다. 

윤재호 감독은 십여 년간 쌓은 필모그래피를 통해 시스템에서 소외된 약자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왔다. 장편 다큐멘터리 ‘마담 B’(2015)에서 탈북 여성의 극적인 삶과 목숨을 건 이주 과정을 기록했고,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던 첫 번째 장편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는 탈북 여성 앞에 놓인 폭력적인 현실과 비극적인 가족관계를 섬세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보여 준 수작이다. 탈북민을 소재로 다룸에 있어, 감독은 분단이나 폭력적인 현실 자체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개인의 기억과 감정에 보다 집중한다. 자칫 자극적이고 신파로 소비될 수 있는 지점을 배제하고, 한 인간의 진실을 오롯이 드러낸다.

짐승이 아닌 사람

한국 영화에서 탈북민은 제3국에서 온 난민이나 이주노동자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 난민이나 이주노동자는 배타적인 한국 사회의 일방적 피해자로 자주 형상화되지만, 탈북민은 초능력에 가까운 무술 실력을 갖춘 살인 무기거나, 여성을 납치해 인신매매하는 범죄자 등 악마적 캐릭터로 빈번히 등장한다. 이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인의 복잡한 감정과 정치적으로 덧씌워진 폭력적인 시선을 반영한다. 영화 ‘파이터’ 속 진아의 항변은 한국 영화의 주류가 된 왜곡된 탈북민 캐릭터에 대한 일갈이다.

“조선 사람들은 어째 북조선 사람들을 특공대 출신으로만 봅니까? 남조선 영화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북조선 인민들이 무슨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는 짐승으로 표현되지 않습니까. 북조선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탈북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윤재호 감독의 ‘파이터’ 윤재호 감독은 영화에서 인물의 눈빛과 표정에 집중한다. | 사진(부분): © (주)영화사 해그림
여기 짐승이 아닌, 홀로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 여성 진아(임성미)가 있다. 남한에 온 지 다섯 달이 됐고, 남한 정부의 감독하에 진행된 적응 기간을 마친 후 새로운 집으로 입주했다.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진아에게 일상의 고됨을 더한다. 유흥업소를 제외하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청소나, 주방 보조 같은 저임금 직종이며, 성추행을 당하고도 되레 협박을 받는 처지다. 청소 일을 하던 체육관에서 권투에 재능을 보이는 진아를 지켜보던 코치와 관장은 그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고, 선수가 될 것을 권유한다.
 
영화는 진아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대사나 극적인 요소로 설명하기 보다 인물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보여준다. 진아로 분한 임성미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는 많은 장면에서 공감과 울림을 전한다. 다만, 도인 같은 관장(오광록)과 따뜻하고 다정한 태수(백서빈)가 왜 이토록 진아에게 헌신적인지 그들의 눈빛만으로 납득되진 않는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사랑에도 이유는 있지 않을까.
 
몇몇 아쉬운 점이 있지만, 영화 ‘파이터’가 탈북 여성을 카메라로 비추는 방식은 옳다. 감독의 신중한 시선은 관객에게도 전해져 진아를 짐승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온전히 바라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