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여전히 큰 그의 빈자리

Rainer Werner Fassbinder
© Rainer Werner Fassbinder Foundation

파스빈더가 죽은 지 30년이 넘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이 재능 있는 감독, 심지어 천재로 불리던 그에 대한 향수 어린 기억 외에 남아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 답은 어렵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파스빈더만큼 열렬한 관심을 받은 독일 감독은 아마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저먼 시네마 시네아스트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것 역시 파스빈더였다.

TV에서 만든 작품들까지 일반적인 극영화 길이로 환산해 추려 본다면, 파스빈더는 13년 동안 약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감독들에게 이는 꿈같은 숫자이다. 죽기 약 3년 전 파스빈더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Berlin Alexanderplatz)“에서 자신의 작업속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내게는 오직 이 정해진 시간 밖에 없었다.“

영화데뷔작인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Liebe ist kälter als der Tod)“에서 파스빈더는 개인주의를 고집하며 대규모 범죄조직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소규모 포주 역할을 연기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정치적인 우화, 혹은 이 사회에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설명하려는 예술가 파스빈더의 새로운 시도로도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있어 할리우드에서 차용한 모티브들은 인용이 아니라,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캐릭터들의 헛된 시도를 돕는 보조물이다. 이는 파스빈더의 작품에서 가장 끈질기게 추구된 중심 모티브 중 하나였다. 의사소통 능력의 파괴, 특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의 파괴 말이다.

폐쇄의 이미지

처음부터 파스빈더는 영화 속에서 폐쇄의 이미지를 탐색했다. 그의 영화에서는 자유의 감정을 환기시킬 만한 초점 맞는 롱샷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초기 작품에서는 시각적 마비까지 나타나고는 했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이유도 작용했을 수 있지만, 아무튼 이는 영화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파스빈더는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 시점에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거의 마비상태로 폐쇄공포증에 이를 만큼 압박된 관념들은 등장인물들의 내적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파스빈더에게 영상은 언제나 스토리만큼 중요했다.

시나리오나 적어도 그 초판이 이미 오래 전에 다른 저자에 의해 씌어진 시점에 파스빈더가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조차도 파스빈더의 필치, 감성, 중심 모티브를 드러내 보였다. 예를 들어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은 가수 랄레 안데르센(Lale Andersen)에 대한 역사적인 멜로 드라마를 넘어, 스스로를 체제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위해 타협하는 한 예술가에 대한 우화가 되었다. 이는 파스빈더 자신이 영화감독으로서 독일에서 겪은 갈등이기도 했다.

후기의 대작(Opus maximum)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Berlin Alexanderplatz)“으로 이끈 것은 폭이 넓지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목표를 추구하는 하나의 길이었다. 겉보기에 오직 개인사에만 집중하는 듯한 스타일은 파스빈더의 작품에 정확성을 부여하고, 뉴저먼 시네마의 수많은 메시지무비나 우화영화 그 어느 것보다 더 큰 사회적 관련성을 갖게 한다.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고통은 한 번도 추상적인 사회질서에 의해 해결된 적이 없다. 해결책은 늘 체제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세계관들이었다.

“사계절의 상인(Händler der vier Jahreszeiten)“ 에서는 한 남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술을 마신다. 그의 주변에는 자신이 그의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도 그 문제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 시퀀스로 파스빈더는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1969년 폴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öndorff)가 베르트 브레히트(Bert Brecht)의 초기 작품 “바알(Baal)“을 영화화하면서 파스빈더가 주인공역을 맡았을 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파스빈더는 그 자신의 죽음을 미리 연기했었다. 그런 암시들은 심지어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에피 브리스트(Effi Briest)“에서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네가 노(No)라 말하지 않으면, 너는 다른 사람들이 마흔 살에나 이르는 곳에 스무 살에 이미 다다르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이 마흔에 가 닿는 곳에 스무 살에 이미 다다르고, 종국에는 너무 빨리 끝나버린 삶. 혼란스럽게도 파스빈더의 작품 속에서는, 되돌아보건대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암시처럼 볼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파스빈더의 삶은 죽음까지도 넘어서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역사 기록자로서의 영화감독

사람들은 흔히 파스빈더의 정치적인 성향을 물었다. 그 답은 간단하다. 그는 모든 이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파스빈더가 스스로를 “좌파“라고 이해했다면 그것은 정당이나 이념체제의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옴니버스 영화 “독일의 가을(Deutschland im Herbst)“ 중에서 파스빈더가 고백한 절망적인 정치적 무력함은 “퀴스터 부인의 천국 여행(Mutter Küsters Fahrt zum Himmel)“에서 예고된 바 있다. 개인적인 재앙을 겪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다양한 좌파 정치 그룹에서 도움과 안식을 구하다가 결국은 발견하지 못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스토리를 통해 역사를 반추하는 파스빈더의 방식은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Die Ehe der Maria Braun)“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독일 역사기록의 한 작품인 이 영화는 2차대전 후 재건시대의 개인적 삶과 행복에 대한 역사기록물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파스빈더가 그 이전의 모든 작품들로부터 얻은 경험을 한데 엮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작품인지도 모른다. 성공과 좌절을 그린 이 영화 안에서 중심 모티브와 톤의 형태, 전형적 장면에 모순적이고 풍부한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 회의적 유머, 역사적 지식, 특히 그 사이 이룩된 수작업적 완성도는 서로 연결되어, 대중성과 계몽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의 한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담한 독학자에서 자주적인 예술가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파스빈더는 영화 하나하나를 통해서 늘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새롭게 증명하고자 했거나 증명해야만 했던 듯 여겨진다. 파스빈더가 지칠 줄 모르고 왕성하게 활동한 본래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의식과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제작방식, 특히 집단 내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에 대한 욕구로 말미암아 파스빈더는 공동의 창조력에 대한 소망을 마음껏 펼쳤다. 보다 어려운 것은 공동의 통찰에 대한 희구를 작업의 결과로 실현해내는 일이었다. 파스빈더가 추구한 집단적 창작과정에는 한계와 위험성이 존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스빈더야말로 늘 극단적인 심연, 자신 안의 어두운 면을 경악하며 깨닫곤 하는, 위험에 처한 낭만주의적 예술가라는 신화적 전형을 닮아있었다.

파스빈더가 그러한 내면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모든 영화가 증언한다. 언젠가 파스빈더가 필자에게 자신이 진실게임에 매료되어있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게임으로 서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이 진실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며 눈사태와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치유 효과를 전혀 장담할 수도 없는 그런 게임들 말이다. 파스빈더의 인격에 대한 일부 공격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었다. 다만 파스빈더는 이런 진실게임들에 있어 스스로에게도 가차 없이 엄정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영화 중 많은 작품들이 결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파스빈더가 작품에서 커다란 행복의 이미지를 구상하지 못한 것도 이렇듯 씁쓸한 진실에 마음이 끌린 데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파스빈더의 작품을 특징짓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비전과 대안의 부재이다. 파스빈더에게 현재의 충격은 너무나 깊었다. 작품에서도, 삶에서도, 파스빈더에게 해피엔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오늘날 여전히 파스빈더의 영화들을 먼 이국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 필자에게 그 답은 간단하다. 파스빈더의 작품은 우선 독일을 알기 위한 정확한 자료가 된다. 두 번째로 파스빈더는 대담한 독학자에서 자주적인 예술가로 나아가는 유효한 길을 보여주었다. 또 예산 조직에 있어서도 창조적이고 돈이 (거의) 없이도 영화를 만드는 능력을 지닌 감독이었던 만큼, 파스빈더에게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독일 영화계는 오늘날까지도 파스빈더의 예술적 후계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