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의 회고
한국에서의 바그너 초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974)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1974) | © 국립오페라단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바그너의 작품이 공연된 것은 1974년이다. 1948년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오페라가 공연된 지 25년 만의 일이었다.

광복 후 미군정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이 시작되던 1948년 11월에 시공관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춘희)"가 우리나라의 첫 오페라 공연이었다. 인기는 대단했다. 그래서 8일 동안 평일은 2회, 일요일에는 3회 공연을 강행했고, 다음해에 다시 리바이벌되었다. 이어진 작품은 구노의 "파우스트(5막 중3막까지만 공연했다)", 그리고 비제의 "가르멘"이 1950년 공연되었으며, 현제명의 "춘향전" 같은 창작 오페라도 공연했다.

6.25 전쟁 중에도 오페라는 계속되어 부산과 대구에서 김대현의 창작 오페라 "콩쥐팥쥐"를 비롯한 공연이 이루어졌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현제명의 "왕자 호동"을 시작으로 "리골레토", "라 보엠" 등이 공연되면서 오페라단도 늘어났다.

1961년 5.16 이후 새 국립극장 설치령이 생겼고, 그에 때라 1962년 국립 오페라단이 창단되었다. 장일남의 "왕자 호동"을 시작으로 "돈 조반니", "루치아", "가면무도회" 등의 레퍼토리를 늘였고 독일 일본과 합작공연도 했다. 1968년 창단된 김자경 오페라단은 "나비부인", 장일남의 "원효대사", "피가로의 결혼", "마농 레스코" 등을 공연하며 70년대로 이어졌다. 나는 1970년 김자경 오페라단의 "아이다" 공연을 위한 오디션에 참가하여 운 좋게도 주역을 맡아 오페라 무대에 본격 데뷔했다.

이 시기까지 공연된 작품들을 보면 이탈리아의 유명 작품을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작품과 함께 창작 오페라도 꾸준히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작품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이었지만, 독일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작품들 외에는 없었다. 특히 바그너는 출연자 오케스트라 제작자 모두에게 너무 어려운 작품이었기에 일본만 해도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시기에 국립 오페라단에서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레퍼토리로 선정한 것은 음악적으로 커다란 도약을 바란 것이었다.

국내 최초의 공개 오디션을 통해 젠타 역을 맡다

이 작품을 위해서 국립 오페라단은 처음으로 주역 오디션도 시작했다. 창단된 이후로 국립 오페라단의 공연에는 기라성 같은 한국의 제1세대 성악가들만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역도 아닌 주역 오디션이라니! 그것도 바그너의 국내 초연 작품에! 내게는 김자경 오페라단의 "아이다" 때보다도 더 떨리는 오디션이었다. 더구나 앞에 앉은 심사위원은 '홍핏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홍연택 선생님이었다. 홍선생님은 이미 "아이다" 공연 때 지휘를 맡으셨기에 초면이 아니었다. 그리고 연습 때 악보를 집어 던지고 다 외운 암보 상태로 지휘하셔서 출연자 전원을 떨게 했던 분이다. 그러니 그 오디션의 공포가 어땠는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젠타! 정말 가슴 뛰는 바그너 초연 작품의 여주인공 이름이었고, 내가 맡은 새 역이었다. 그 동안 베르디나 푸치니의 음악에 익숙해 있던 나는 그날부터 고난과 환희의 연습이 계속되었다. 석사학위를 위한 독창회에서 바그너의 가곡을 부른 적이 있지만 오페라는 전혀 다른 음악이었다. 발성적으로도 가끔은 참 비성악적이면서 끈적끈적한 선율이었기에 시작 단계에서는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연습이 |쌓이면서 어떤 강인한 힘에 의해 저절로 그 선율에 빠져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정말 다른 음악, 다른 경험이었다.

죽지도 못하는 꼴로 바다를 떠돌다가 7년 만에 한번씩 육지에 상륙하여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연인을 찾는 네덜란드인! 그를 숙명적으로 사랑하는 젠타의 아리아 "네덜란드인의 발라드"는 내가 온몸의 호흡을 다 토해내듯 부르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힘이 나는 신기한 노래였고, 또 내게 전혀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반음씩 반음씩 고음으로 올라가는 음계는 성악적으로 가장 어려운 테크닉의 하나다. 네덜란드인과 만나는 극적인 장면에서 가장 극적인 고음을 내도록 작곡된 부분은 정말 어려웠다. 연습에서 여러 번 실패하여 밤잠 못 자고 고민하며 운 적도 많았다. 그러나 초연 당일 무대 위에서 그 부분을 성공적으로 노래하고는 뛸 듯이 기뻐서 무대 뒤에 있던 사람들과 마구 껴안으며 행복해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더 어려웠던 부분은 오현명 선생님의 연출이었다. 제 2막에서 젠타는 뒷벽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인의 초상화를 쳐다보지 않는다. 동네 처녀들이 둘러앉아 물레를 돌리며 실을 뽑고 있지만 젠타는 현실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에 홀린 듯 그 불행한 네덜란드인을 구하려는 일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객석에 전달되도록, 아니 내 스스로 젠타의 심정이 되도록 집중하는 일은 마음과 달리 그 표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느껴질 만큼 열심히, 참으로 열심히 젠타가 되려고 노력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는 모두 국립오페라단과 더불어 한 단계 더 발전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오래 미루어두었던 숙제를 다 한 기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공연된 바그너의 작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은 1974년 5월 1일부터 6일까지 국립극장에서 다음 제작진과 출연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휘: 홍연택
연출: 오현명
합창지휘: 나영수
미술: 조영래
무대감독: 유경환 박인원
피아노: 임헌원 석경애
조명: 구길웅
분장: 전예출 최효성 박수면

출연
네덜란드인: 김준일 윤치호
젠타: 정은숙 정영자
달란트: 김명지 진용섭
에리크: 유충열 정광
수부장: 김선일 김태현
마리: 이연숙 박영수 국립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