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Alt 1)서브 내비게이션 바로가기(Alt 3)메인 내비게이션 바로가기(Alt 2)

다비드 후겐디크의 평론
폭발하는 뉴런들

토마스 멜레 작가
사진: 다그마 모라트

토마스 멜레는‘등 뒤의 세상‘에서 자신의 양극성 장애에 대해 들려준다. 본인의 산산조각 난 삶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기력을 소모하는 독서물이다. 그리고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복잡한 수치심이 드는 건 흔치 않다. 읽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갈등이 부끄럽다. 공격을 당해 짓밟히고 몸이 마비된 느낌이 들면서도 자꾸만 재미있게 읽혀서다. 내게 있는 관음증이 부끄럽다. 갑자기 내가 감정의 쇼 마스터, 감정의 이벤트 매니저가 되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쉴새 없이 물어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이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걸 확신하지만, 정작 이 책 자체는 자기 탐색이며 비극적인 실제 이야기라는 것, 그것도 오직 저자에게만 속할 뿐 읽는 독자나 비평가의 환호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부끄럽다.

책의 저자는 토마스 멜레, 책 제목은 ‘등 뒤의 세상’이다. 이 책은 우리가 독자로서 느낄 법한 것보다 훨씬 큰 갈등과 수치심에 대해 들려준다. 책은 1975년생인 작가가 가지고 있는 양극성 장애의 연대기이며, 세 번의 조울증 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한 인간이 육체를 가진 유령이 되는지 그 존재의 허약함을 이야기하고, 찰나의 행복과 견고하게 쌓여가는 불행, “뇌가 타버린 광대”로 살았던 세월, 하루하루가 희뿌연 유리 같고 한 주 한 주는 미로 같았던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심각한 건 작가가 이 광대인 동시에 광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양극성 장애는 뭔가 참담하고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동시에 이 질환은 커다란 모욕이다. 작가 멜레는 어느 날 갑자기 더는 제 집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는 모욕을 당한다. 재능이 뛰어난 국가 장학생이자 천재적인 작가, ‘식스터’와 ‘공간 요구’의 저자, “하리보 슬럼가” 출신으로 석탄 냄새가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멜레는 머릿속의 뉴런들이 폭발하면서 자신이  “세계정신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백화점에서 느닷없이 야구 방망이를 사서 그걸로 베를린 미테 지역을 박살내려 하고(결국엔 농구공만 산다), 자신과 세상의 영원한 충돌을 견디지 못해 열차 유리창을 때려부수고, 넘치는 자기애에 빠져 고인이 된 문학가들이 눈앞에 있다고 믿는다.

베르크하인의 피카소

멜레는 음식점에서 푸코를 보고, 부퍼탈 기차역의 맥도날드에선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본다. 어느 날 밤엔 베르크하인에서 그렇게도 싫어하던 피카소를 만난다. 그는 피카소의 바지에 적포도주를 붓는다. 또한 그는 마돈나와 섹스를 했다고 믿었으며, 비요크가 자신만을 위해 옆의 바에서 노래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헐크와 오만함으로 만들어진 비극이다.” 멜레는 이렇게 적었다. 조증 발작과 망상이 나타날 때면 그는 세상에 대해 자신을 과장해 모든 게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붕의 참새가 정말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지저귄다”고 믿었다. 기호가 모반을 일으켰다. 거리에 흐르는 끝없는 얼굴들의 물결, 인터넷 글, 뉴스,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연설, 9/11 테러, 심지어 죽은 독재자들까지 모두 그에게 말을 걸고 그를 비웃었다. 모든 게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고 그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이 세상은 기호적, 공감각적 테러인 동시에 오직 그를 위해서만 지어진 듯한 디즈니랜드였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낮이 사라졌다고 멜레는 말한다. 그는 미친 듯이 날뛰고, 물건을 훔치고, 소리지르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텔레비전은 늘 켜져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자칭 “독일의 제왕들“과 “저주받은 자들의 천사”가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기호는 없고 시선만 쏟아지는 감옥이다. 그곳에서는 멜레가 대학에서 배운 풍자의 갑옷도 문화이론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푸코나 데리다도 소용없었고, 책에서 줄기차게 튀어나오는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도 쓸모 없었다. 멜레가 보기에 유일한 치유 가능성은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보내면서 차츰 그는 내면에서 “파괴적인 전쟁”이 날뛰는 것을 알았다. 조증과 우울증의 두 괴물이 벌이는 전쟁이었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다. “살이 찌는 약”을 먹었다. 병원에 머물렀다 다시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멜레는 어느덧 음울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자살 사이트에 들어가 적당한 자살 방법을 찾아본다. “없어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곤죽”이 되어 죽기는 싫었다. 그는 욕실에서 머리에 전선으로 만든 올가미를 씌우며 슈탐하임에서 죽은 독일 적군파를 생각한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아바의 노래 ‘페르난도’가 울려 퍼진다. 그는 응급 상황을 연습한다. 그리고 나중에 의사가 목에 난 전선 자국을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란다.

“소외되고 옆으로 비켜선” 느낌

이런 소모적인 자아 헤집기와 진술이 가끔 소모적인 독서가 되는 것은 토마스 멜레가 커다란 집중력과 촘촘한 자아 지각으로 자신의 질환을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질환을 서술하는 이 책을 그는 ‘실패한 성장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는 ‘소외되고 옆으로 비켜선’ 느낌과 망상을 마음을 위로하는 우의적 미화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책은 너무나 솔직하고 무자비하다. 그래서 저자가 벌이는 질병과의 가망 없는 싸움을 영웅적 행위로 부각시키거나 힘겹게 살아온 삶을 추후 비장하게 신비화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추악하고 고독한 사건으로 묘사한다. 이 책의 극단성과 자신에 대한 냉혹함은 문학적 마음가짐이 아니다.

멜레의 삶은 거리에서, 도시의 밤 속에서, 연극 연습장에서, “문화계 인사들의 조찬 자리”에서 그리고 정신병원 휴게실에서 계속된다. 그 생활은 어느덧 최저 수준의 삶으로 전락했고 “놀림감”이 되어 박살이 났다. 그가 이 생활에서 끄집어낸 문장들에는 종기와 상처가 있다. 이따금 맹수의 발톱과 이빨도 보인다. 90년대 MTV 방송 진행자들의 “방사능을 내뿜는 얼굴”, 슈퍼마켓에 거는 터무니없는 기대, 베를린 술꾼들의 텅 빈 두 눈의 묘사는 독일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분석적으로 날카롭다. ‘등 뒤의 세상’에서는 이렇게 90년대 말과 2000년 초의 베를린 모습까지 스치고 지나가며 이야기한다.

바인더 언어의 세상

멜레는 조증 단계를 묘사하는 언어를 자기 지각의 가장자리까지 끌어당긴다. 그는 “조급했던 감정”은 물론이고 조증이 남긴 기억의 틈새까지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기억으로서의 글쓰기“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삶의 이력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망각했으나 – 망각은 조증이 내려주는 아이러니한 은총이다 – 이젠 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에 뒤늦게 공감하는 글쓰기라는 뜻이다. 그의 언어는 광포하고, 상처받았고, 악의적이고, 예민하고, 역동적이고, 그러면서도 놀라우리만치 통제돼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와 표현은 잠시 질병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뭔가 지속적인 것, 무질서에서도 유효한 것, 머잖아 머릿속에서 다시 폭발할지도 모르는 것을 창조하려 한다. 그의 언어에 이런 단어와 표현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염려가 스며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문장들은 고독과 슬픔과 쇠약과 파괴 욕구에 맞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 나는 하나의 대상이다. 나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곳은 무생물의 세계다.” 세 번째 발작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는 살 곳도 은행 계좌도 없이 빚과 서류 더미에 둘러싸여 세상과 관료주의의 서류철 언어가 집요하게 추궁하는 대상이 된다. 그 언어는 이성이 광기에게 내뱉는 날카로운 독백처럼 들린다. 집행 연기 제안서, 서비스 공급 계약서, 사례 관리 보고서, 요보호 신고서, 비용 인수 양식 등, 모든 활동을 묶어놓는 조치들이다.

조울증 환자의 삶보다 더 수치심에 사로잡힌 인생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멜레는 적었다. 이 책은 그 수치와 후회를 이야기하고, 실제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참담한 노숙 생활을 이야기한다. “질병은 내게서 고향을 빼앗았다. 이제는 질병이 내 고향이다.” 이 질병은 토마스 멜레의 인생 비극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그 비극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기력을 소모시키는, 문학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