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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갑자기 다시 모두 나타났다”

Silvesterfeier '89 am Brandenburger Tor
동서독 국민들이 40여년 만에 함께 새해를 맞으며 마음껏 즐긴다. | Bernd Schmidt © wir-waren-so-frei.de

베를린 주민들이 장벽 위에서 춤을 추며 기뻐한 지 일 년 만에 독일이 통일된다. 호엔쇤하우젠 슈타지 감옥의 수감자였던 사람에게는 통일이 어떻게 느껴졌을까? 슈타지 본부에서 발견되는 아레헨티나산 스테이크, 예기치 않은 재회, 베를린의 클럽들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갑자기 다시 모두 나타났다”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평소에는 사두마차의 말들만이 외롭게 솟아 있는 곳에 11월 9일처럼 기쁨의 불꽃놀이가 일으키는 안갯속에서 기뻐하는 동서 베를린 주민들의 실루엣이 춤을 춘다. 12월 22일부터 독일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통행로 두 곳이 감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위로 사람들이 오른다. 베를린 주민들이 이 순간을 얼마나 즐거워하며 즐기는지 후에 많은 비용을 들여 사두마차를 보수하게 된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며칠 안 되었다. 원래는 가족 축제인 크리스마스가 1989년에는 상징적인 시간이 되었다. 드디어 주민들이 비자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까지 베를린에만 30곳의 새로운 국경 통행로가 생길 예정이다.
Die Mauer vor dem Brandenburger Tor. 사람들이 장벽 붕괴를 축하하며 즐기는 동안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는 이미 장벽 조각들을 어떻게 상업적으로 이용할지 고민한다. | Dagmar Lipper © wir-waren-so-frei.de 마리오 뢸리히는 일 년이 넘도록 헤어져 지냈던 부모님과 다시 만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그는 1985년 헝가리 여행 중 온천장의 수증기 구름 속에서 만난 서베를린의 한 정치인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동베를린에서 만난다. 만나고 또 만난다. 2년 동안 슈타지는 이들 만남의 엑스트라로,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영원한 감시자로 등장한다. 마침내 마리오 뢸리히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헝가리 남부의 국경선을 넘어 유고슬라비아를 통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호엔쇤하우젠 미결감에서 정신적 고통의 날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1989년 마침내 동독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장벽의 붕괴 그리고 1990년으로 넘어가는 유난히 찬란하고 시끌벅적한 1989년의 마지막 날은 그에게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안겨준다.

“흥미롭게도 나는 며칠 동안 장벽이 무너진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예전에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시 모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장벽이 붕괴되던 날 밤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베를린에 계신 아버지가 전화해서 “장벽이 무너졌다”라고 하셨다. 고된 일을 마치고 막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나는 “취하셨어요? 그런 농담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는 끊어버렸다.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거셨다. “아들아, 장벽이 무너졌단다. 창문 좀 열어보렴!”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날 밤 나는 보른홀름 가에 있는 국경 검문소로 가서 거의 2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 포옹을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장벽이 가족과 나를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동독에서 나를 힘들게 하던 사람들로부터 나를 보호해 줬기 때문이었다.” 12월 31일 뢸리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마지막 날을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

이 날 저녁 동독과 서독의 방송사들이 협력하여 브란덴부르크 문의 양편 상황을 번갈아가며 보도한다.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의 독일 국기들이 계속해서 화면에서 펄럭인다. 역사학자들은 통일에 대한 두 독일의 염원이 실현되는 ‘제2의 변혁’에 대해 이야기한다.
Die Mauer wird abgetragen. 장벽이 제거되는 모습. | Monika Waack © wir-waren-so-frei.de 그러는 동안 이미 동독 지도부는 장벽을 어떻게 상업적으로 이용할지 고민한다. 이들은 1월 31일 장벽 조각들을 외환을 받고 팔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은 오늘날 독일의 박물관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장벽은 조각들로 쪼개져 기념품으로 판매되었을 뿐 아니라 도로와 아우토반의 건축 자재로 과거 분리되었던 곳들을 이어주는 데 사용되었다.

슈타지 본부로의 돌격

에르푸르트에서는 이미 12월에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는다. 기쁨의 불꽃놀이가 아니다. 슈타지 본부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다. 수많은 동독 국민들의 삶이 수년 동안 이곳에서 왜곡된 재현처럼 기록되었다. 슈타지 요원들은 주민들의 습관, 정치적 생각, 감정, 관계, 은밀한 세부사항까지 기록했다. 이러한 내용은 비밀리에 말이나 글로 슈타지에게 전달되었는데 때로는 이웃, 친구, 친척 혹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슈타지는 이러한 정보를 자기 국민들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했다.
Sturm auf die Stasizentrale 슈타지 본부로의 돌격. | Jan Kornas © wir-waren-so-frei.de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범인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가브리엘레 슈퇴처, 클라우디아 보겐하르트, 자비네 파비안, 텔리 뷔히너, 케르스틴 쇤 등의 주민 및 여성인권 운동가들을 움직이게 한다. 이들은 에르푸르트 슈타지 본부의 점거를 선도한다. 로스토크와 라이프치히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뒤따라 일어난다.

그로부터 6주 후 1990년 1월 15일, 지금은 안보청으로 불리는 베를린의 국가보안부, 즉 슈타지의 보안요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문을 연다. 부츠를 신은 발들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고 몇 분 후 문서들이 층층이 계단 위를 휘날리며 체제 비판적인 주민들의 눈앞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슈타지의 폭력적인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함도 함께 추락한다. 무력함에서 벗어나는 이러한 대전환은 무엇보다 비밀 문서에 대한 슈타지 권한의 종말을 알린 에르푸르트의 젊은 여성들 덕분이다.
Fleischfunde in der Stasizentrale 슈타지 본부에서 발견된 고기. | © picture-alliance/ ZB | Thomas Uhlemann 이들 그리고 로스토크,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슈타지 본부를 점령한 이들 덕분에 슈타지의 폭력과 감시의 증거이자 억압 도구였던 문서들이 에리히 밀케 슈타지 장관이 11월 6일에 지시한 대로 모두 분쇄되거나 불태워지지 못한다. 이 문서들이 알파벳과 종이 조각들로만 남고 사라지는 순간 사회주의통일당(SED) 국가의 조직과 방식이 은폐될 뿐 아니라 범인들도 혐의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Funde in der Stasizentrale 슈타지 본부에서 발견된 것들. | © picture-alliance/ ZB | Thomas Uhlemann 슈타지 본부를 점거한 이들은 꽉 찬 자루들에서 대량의 문서를 찾아낸다. 수년 동안 고기, 과일, 설탕, 일상용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던 이들은 이곳에서 아르헨티나산 소고기와 같은 고급품들과 슈타지 이발소까지 발견한다. 슈타지의 저장 식품들과 당혹스러움 사이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느낌이 싹 튼다.

에르푸르트에서 시작된 이 큰 움직임은 베를린의 국가보안부를 점거하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그 순간 세상이 얼마나 바뀌는지 그리고 상황이 얼마나 빨리 전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 줄 시에서 한 절망한 슈타지 장교가 점거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총으로 자살을 한다.
Friseursalon in der Stasizentrale 슈타지 본부 내의 이발소. | © picture-alliance/ ZB | Thomas Uhlemann 슈타지 본부들을 감독하게 된 시민위원회는 이 문서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계속해서 자료들이 파기된다. 1991년 말 슈타지 문서관리법이 제정되면서 드디어 문서들을 서고에 보관하고 사람들에게 열람을 허용하기로 결정된다. 슈타지의 피해자들이 문서를 들여다볼 수 있고, 학자들이 이를 연구할 수 있게 된다.
Sturm auf die Stasizentrale 사람들이 슈타지 본부로 돌격하는 모습. | Jan Kornas © wir-waren-so-frei.de 문서의 공개로 명백해진다.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신뢰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불안함이 안도 혹은 실망으로 해소된다. 통일 직전 슈타지에는 19만 명의 ‘비공식 요원들’이 있었다. 자신의 친구, 이웃, 학생들의 개인적인 정보를 슈타지에 넘기는 사람들이었다.      

10월의 벅찬 재회가 자유의 감정을 고무한 이래 어떤 만남들은 옛 상처를 다시 끄집어낸다. “사회주의통일당에 완전히 충성했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은행 창구로 달려가 백 마르크의 환영금을 받았다”라고 마리오 뢸리히는 기억한다.    

이주와 답사

장벽은 계속해서 열려 있다. 도시의 겨울 풍경 위로 이별과 새 출발이 혼재한다.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20만 명이 넘는 동독 국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한다. 이들은 예를 들어 베를린의 마리엔펠데 긴급 수용소 안에 비좁게 앉아 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이 수용소가 가득 차 자리가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동독의 이러한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아마 알 것이다. 25만 명의 인력이 부족하다. 병원에서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환자들을 겨우겨우 돌보는 수준이다.

2월 중순 며칠 동안 여름 햇살 같은 햇볕이 내리쬐자 수많은 서독인들이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 속에서만 알던 곳들로 향한다. 사람들은 폰타네의 ‘배나무 할아버지’와 동행하며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변경주를 거닌다. 조수석에 앉은 이들은 지도에서 마법 같은 도시 이름들을 찾는다. 해적 슈퇴르테베커의 팬들은 슈트랄준트와 비스마르,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은 크베들린부르크와 괴를리츠 그리고 당연히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을 찾는다. 동독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1950년대를 떠오르게 한다. 마치 이미 오래전에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동독 국민군의 막사 문들이 열려 있은 지 오래다. 군인들은 낚시를 하고 있고, ‘무장 기관’의 삼엄함은 온데간데없다. 그나마 겨울에 문을 연 몇 안 되는 카페, 식당, 숙박시설들이 밀려드는 주말 손님들로 가득 차 서독 관광객들은 배고픔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당시 나는 서베를린의 섬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힘들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오는구나. 동시에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대단한 결정도 없이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동베를린 한복판의 낡은 건물들에 첫 클럽들이 들어선다. “많은 것들이 거창한 허가 없이도 가능했다. 서베를린에도 드리웠던 28년간의 침체기가 지나고 자유를 만끽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서베를린도 오랫동안 곤경에 처해 있었고, 동독은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들어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모노폴리 게임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뷔로크라토폴리 게임을 했는데, 지금은 잠시 트레조어와 같은 클럽에서 서류 더미나 상업주의가 빠진 파티들이 열린다. 집에 즉석 주점들이 들어서고, 주민들이 1층 창문 너머로 병맥주를 판다. 새로운 시대가 동베를린 한복판의 낡은 건물들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옛 국경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침체를 상징하던 폐허와 쇠퇴한 건물들이 새로운 시도의 장소로 변모한다. “당시의 클럽 문화는 경제, 소비, 빠르게 돈 벌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고 자유를 축하하는 것이었다.”
Party in Ostberlin 1990 동독이 서서히 무너지는 동안 베를린에서는 파티 열풍이 인다. | © picture-alliance ZB Manfred Uhlenhut 마리오 뢸리히는 통일에 찬성한다. “동독 탈출에 실패하고 호엔쇤하우젠 슈타지에 갇혀 있으면서 나는 “드디어 체제가 몰락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해 봄 동베를린의 연대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복잡한 감정들이 들었지만 마리오 뢸리히는 서베를린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여전히 기쁘다. 그는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에도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생계에 집중한다. “모두가 우선은 자신을 챙기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신경 써야 했다.” 

나중에 옛 학교 친구들 그리고 80년대 중반 동베를린에서 자신의 동성애자 커밍아웃을 함께 겪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나서야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행사, 낭독회, 단상 토론, 영화 등에서 만나고 이야기했다. 회사들의 파산으로 많은 친구들과 그 가족이 어려움에 처했다. 이들은 우선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이들에게 매우 힘들고 슬픈 과정이었다. 새로운 사회의 차가운 면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감정이 외국인 혐오로 표출되기도 했다고 마리오 뢸리히는 설명한다. “그들은 독일에 와서 정착해 살려는 베트남 사람들이 갑자기 독일 사람들보다 더 잘 살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몇 년 후 통일 독일의 가장 슬픈 장면들이 언론을 뒤덮는다. 불에 타고 있는 보호 수용소들의 모습이 신문들의 일 면에 실린다.

출세와 과거의 짐

사회주의통일당 당국 직원들이었던 뢸리히 부모님의 옛 이웃들이 갑자기 상관이나 부서장들이 된다. “출국 신청을 거절하는 일을 하던 내무부서 여직원 한 명이 갑자기 트렙토브 쾨페니크 노동청의 대표가 됐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아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인맥과 관계를 통해 새로운 나라로 입문해 시의원이 되거나 심지어 연방의회 의원이 되기까지 했다. 슈타지 간첩이 말이다!”

90년대 초 그는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90년대 중반에는 베를린의 카우프하우스 데스 베스텐스 백화점 담배 코너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직업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사실 세상은 괜찮았다. 나는 당시 에이즈 확산 방치 단체인 베를린 에이즈 힐페에서 활동했다. 근로자 협의회 소속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정치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나는 1989년과 1990년 이후에도 수년 동안 이러한 모범공산주의자들 중 누가 통일 독일에서 출세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쓰라리게 이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위해 그리고 답답함과 고루함 때문에 동독을 탈출하기 이전의 시간을 그는 기억 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구금되어 있던 시간에 대해 아직도 남아 있는 많은 기억들은 떨치려 한다. “1999년 1월 17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백화점 7층으로 출근해 담배 판매대를 세웠다. 갑자기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어두운 양복 차림에 그을린 갈색 피부. 처음에는 유명인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12년 전 1987년 호엔쇠하우젠의 슈타지 감옥에서 수개월 동안 나를 괴롭히고 심문하고 정신적으로 고문했던 슈타지 장교였다! 그를 알아본 순간 나는 창백해진 채 떨기 시작했다.” 전 슈타지 장교는 마리오 뢸리히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치 악마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다시 보게 되면 총구를 어디에 겨눌지 전에 자주 생각해보곤 했었다. 물론 꿈을 꾸거나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마리오 뢸리히의 머리 속에는 다른 생각이 번쩍 떠오른다. 그의 얼굴을 한 대 칠까. 그는 맞을 만하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러면 나는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얼굴을 한 대 치는 것은 순간적인 만족만 줄 뿐 과거를 정리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뢸리히는 “그 장교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그때까지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었고,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Das Einkaufszentrum KaDeWe 마리오 뢸리히는 과거 호엔쇤하우젠 감옥에서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문했던 슈타지 장교를 카우프하우스 데스 베스텐스 백화점에서 다시 만난다. | © picture alliance / dpa | dpa 그가 가려고 하자 마리오 뢸리히는 자신을 괴롭혔던 그 남자의 소매를 잡으며 “죄송한데, 우리 아는 사이죠!”라고 말한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베를린 쇤하우젠 감옥의 슈타지 장교셨잖아요.” 뢸리히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다. “밝았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차가워지면서 “그래서 지금 저한테 뭘 원하시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나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화점에 있는 사람들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줬다. 1987년 탈출을 시도하다가 구금되었고, 당신이 나를 심문했었다고 말이다. 당시 그는 나에게 2년에서 8년의 형을 내리려고 했다. 탈출 시도로 조국을 배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큰 소리를 내며 당신은 감옥에 있어 마땅했다는 사실을 모르냐며 소리쳤다. 그가 어떤 사과를 하겠는가? 후회는 어린아이들만 하는 것이다.” 그가 돌아서서 간다.

그 순간 마리오 뢸리히의 속에서는 자신이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올라온다. “그것들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것뿐이었다.” 그는 현관으로 가서 소리를 지른다. 사내 간호사가 그에게 진정제를 주고 그를 집으로 보낸다. “집에 와서 제대로 앓았다. 나는 과량의 수면제를 먹었다.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나를 빈 약통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나는 병원에서 다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삶의 의욕이 전혀 없었다. 그 슈타지 장교 같은 사람들이 통일된 독일에서 그렇게 잘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뢸리히는 의사들과 말하고 싶지 않다. 의사들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대화하면서 주임의사는 마리오 뢸리히가 젊은 시절 ‘탈주자’로 호엔쇤하우젠의 슈타지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사는 나에게 트라우마가 있음을 알고 그러한 기념지에 관한 전단지를 나의 침대로 가져왔다. “당신이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이 당시에 목표하던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가서 당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라. 그러면 나아질 것이다. 모두에게는 아니겠지만, 당신에게는 이것이 최선이다.” 나는 의사가 말한 것을 20년이 넘도록 하고 있다.”

서독 제품

나무들이 싹을 틔우고 회색빛 도시에 봄이 드리우는 동안에도 동독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동독은 ‘제3의 길’, 즉 더 나은 사회주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국경 검문이 없기 때문에 많은 서독 사람들이 동독에서 저렴하고 안전하게 쇼핑을 한다. 공식적으로는 방문자들이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를 계속해서 1 대 1로 거래하는데, 후에는 이것이 1 대 3이 된다. 암시장에서는 시세가 1 대 10으로 그 추세는 계속해서 떨어진다. 동독 사람들도 값비싼 소비재를 비축한다. 서독에서보다 비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은 수년 동안 힘들게 일해서 모아둔 돈이 그 가치를 모두 잃을까 봐 두렵다. 서독의 상품 세계, 동일한 물건을 다양한 회사들이 천 가지 버전으로 만든 제품들이 밀려들어온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수년간의 갈망과 장사진을 친 시간들에 대한 대조적인 응답이다. 서독 소비재에 대한 갈망이 워낙 강해 동독 제품들은 열등하고 매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독의 경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Zwei Frauen im Supermarkt 국경 검문이 사라진 후 많은 서독 사람들이 동독에서, 많은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서 쇼핑을 한다. | © picture alliance / ddrbildarchiv | Manfred Uhlenhut 이러한 변화는 소비와 돈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임시 컨테이너들에 서독 은행들이 새로운 지점을 연다. 첫 상인들은 다채로운 열대과일들을 서독 돈과 맞바꾼다. 이들은 봄의 햇살에 칠이 반짝이고 모험과 자유를 이야기하는 듯한 긁힌 자국을 자랑하는 중고차들과 경쟁한다. 갑자기 갈망에 가격표들이 달린다.      

마리오 뢸리히는 장벽 붕괴 후 처음 몇 달간의 소비 형태를 정치적인 표현으로도 해석한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체제를 원하는 것이다. 갈망과 아픔은, 50년대 이래 서독 등과 같은 소비사회에서 으레 그랬듯, 쇼핑 열풍으로 그 감각이 무뎌진다.

DDR-Bürger*innen protestieren 많은 동독 사람들이 화폐 통합을 지지하며 시위를 벌인다. | © picture alliance Wolfgang Weihs | Wolfgang Weihs 동서독 국민들은 국가 행정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혼란한 상황을 잘 이용하고자 한다. ‘폴란드 시장’에는 몇 달째 그래왔듯 폴란드 상인들이 판매대를 세우고, 서베를린 사람들은 저렴한 암시장 시세를 이용해 동베를린에서 쇼핑을 한다. 주유소와 매장의 선반들이 텅텅 비게 되자 새로운 법령이 생긴다. 서독 국민들은 서독 화폐로만 물건을 살 수 있게 된다. 영업의 자유는 이미 1월에 도입되었고, 신탁 관리청이 설립된다. 신탁 관리청은 국가 경제를 시장 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기관으로, 기업들을 예를 들어 민영화하거나 처분한다. 이 과정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많은 사회적 차이나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할지도 모른다. 한편 서독의 연방 정부는 돈의 유출과 서독 이주를 멈추기 위해 화폐 통합을 추진한다. “서독 마르크가 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고, 오지 않으면 우리가 갈 것이다.” 월요 시위를 위해 만들어졌던 이 경고 문구의 현수막들이 이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소비에 대한 열망이 정치적 변화를 자극하는 가운데 우리는 통일 국가를 향해 간다.
Ein Supermarktregal voller Suppen 넘쳐나는 스프: 일부 동독인들에게는 서독 슈퍼마켓의 넘쳐나는 제품들이 부담스럽다. | © picture alliance ZB ddrbildarchiv

공동의 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의 현실, 생각, 일상이 정당들의 영역을 넘어 확장된다. 동서독의 단체와 기관들이 서로 교류하기를 원한다. 정당들은 두 독일 국가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비전을 내세운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 정당인 민주사회당(PDS)은 동독의 독립성을 고수하며 동독을 위한 ‘제3의 길’을 요구한다. 이와 함께 동독에는 정당 다원주의를 시사하지만 실제 의회에서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연합 정당들이 있었다. 이들은 재빨리 파트너로 협력할 서독 정당들을 찾아 나선다. 자유민주당(FDP)은 서독의 두 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하고, 동독 기민당(CDU)은 서독의 기민당과 협력한다. 1990년 2월에는 시민운동 지지자들이 동맹 90(Bündnis 90)을 수립한다. 사회주의통일당 체제에 대해 저항하며 큰 공로를 쌓은 이들은 희망을 가득 품고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동독의 민주주의적 변화를 꿈꾼다. 따라서 당연히 서독 파트너를 찾지도 않는다.
Wahlkampf zur Volkskammerwahl 1990: Wahlplakate und Stände der Parteien 1990년 3월 동독에서 첫 민주주의 선거가 시행된다. | © picture alliance / zb | Eberhard Klöppel 수개월째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장벽 붕괴, 2+4 회담, 동독 마르크의 급락. 마치 장벽 양편의 침체와 놓친 것들을 만회하기 위해 시간이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나고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시간보다 세 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다. 최고인민회의 선거까지 1990년 3월 18일로 앞당겨진다. 이 선거는 동독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가 된다. 유권자들이 처음으로 진정한 선택권을 갖게 된 선거다. 더 이상 단일후보 리스트가 없고, 후보자들 간의 경쟁이 벌어진다. 93.4%라는 선거 참여율은 거의 유토피아적인 느낌을 준다. 오히려 선거가 허울에 지나지 않는 국가들에서나 주로 나타나는 결과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혹은 적어도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투표소로 모여든다.

2+4 조약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앞당겨진다는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 세력에게는 독일의 통일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회의적이다. 독일이 다시 유럽 한복판의 통일국이 되어야 할 것인가? 마거릿 대처는 이렇게 표현한다. “통일 독일은 그야말로 너무 크고 너무 강력하다.” 이미 장벽 붕괴 직후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통일을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표현하며 회의적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베를린에서는 궐기의 분위기가 넘칠 뿐 아니라 권력 이동에 대한 인식이 퍼져나간다. 두 독일 국가는 냉전 체제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특히 전독일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이라는 아이디어를 비판한다. 하지만 1990년 2월 10일 모든 것이 변한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독일 통일에 동의한다. 

그로부터 몇 달 전 1989년 10월 7일 시위대들은 고르바초프를 동독의 노선 변경을 일으킬 수 있는 기대주로 여겼다.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떠날 때 “고르비, 고르비, 도와줘!”를 외쳤지만 시위에 대한 가차 없는 진압이 펼쳐진 바 있다. 그런 지 몇 달 만에 길이 열리고 두 독일 국가와 2차 세계대전의 4대 승전국이 참여하는 2+4 회담이 시작된다.

회담을 통해 체결된 조약은 독일에게 완전한 연대를 보장하고, 승전국들은 통일 독일에 대한 자신들의 특별 권한을 포기한다. 두 독일 국가는 1945년에 수립된 국경을 인정한다. 특히 서베를린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예를 들어 동서독에 주둔해 있는 중거리 미사일로 인해 그들의 목전에는 늘 동서 세력의 구실이 존재했다. 
Feier vor dem Reichstag 많은 동독인들에게 통일은 부를 의미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변화는 일부 도전과제들도 함께 불러 일으킨다. | © picture alliance/ dpa | dpa 7월 초에는 동서독 국경에서의 검문도 공식적으로 중단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국경은 45년 동안 약속, 금지, 아픔을 의미했다. 그랬던 국경이 지금은 동독의 개방 프로세스를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경제 통합, 화폐 통합, 사회 통합과 함께 일어난다. 그 후 속도가 더 붙는다. 동독은 서독의 경제 및 법질서의 상당 부분과 사회보장체제를 받아들이고, 서독 마르크로 통화가 단일화된다. 9월 말 동독이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하고, 이어서 통일 조약이 체결된다. 정치인들이 2+4 조약에 서명하기 두 주 전쯤 동독 지역의 신연방주들이 서독의 기본법 적용 지역에 편입된다.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1990년 10월 2일 동독의 최고인민회의가 마지막으로 소집된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181일 만에 적극적으로 함께 통일을 만들어낸 최고인민회의의 공로가 인정을 받는다. 아직 통일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안도의 분위기가 확산된다. 

그리고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된다. 

이제 독일은 특히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도전과제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 특히 많은 동독 국민들은 그 과정을 다르게 상상했었다. 하지만 10월 초의 이 날 저녁에는 이러한 걱정을 우선 접어 둔다. 

안도의 순간으로서의 통일은 독일의 새로운 경제적 동력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마리오 뢸리히와 같은 사람들의 인생은 재해석되고 새로워지며, 사회는 새로운 공동의 가치를 찾아 나가야 한다. 

뢸리히는 시대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잠깐 멈춘 후 이렇게 말한다. “요즘에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며 대학, 학교, 다양한 재단에서 강연을 한다. 이러한 생활은 말하자면 당시의 불의에 대한 나의 복수다. 나는 오늘날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당시의 끔찍한 기억들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다.” 그는 잠시 멈춘 후 한 마디 더 덧붙인다. “하지만 너무 자주 하지는 않는다. 너무 자주 하면 나의 생각이 영원히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