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들에 살아 있는 바우하우스
전세계로 퍼져나간 유산

전통적 지침에 따른 새로운 교육방식: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학은 지금도 바우하우스의 기본 교육원칙에 따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전통적 지침에 따른 새로운 교육방식: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학은 지금도 바우하우스의 기본 교육원칙에 따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 사진 (부분): © picturealliance / dpa / Jens Wolf

바우하우스가 품었던 이상은 전세계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교육의 기본원칙까지 바꿔놓았다. 바우하우스의 탄생지인 바이마르에서는 지금도 바우하우스 설립자의 기본이념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이 있다. 이 밖에도 바우하우스의 맥을 잇고자 한 교육기관들이 많았지만, 그 중 일부는 아쉽게도 폐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대학(Bauhaus-Universität)의 건물들 사이에 학생들이 둘러앉아 저물어가는 가을의 마지막 햇빛을 쬐며 수다를 떨고 있다. 이 때 하겐 횔러링(Hagen Höllering)이 등장한다. 건축가인 횔러링은 현재 바우하우스대학 산하 표현방법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학은 지금도 옛날 바우하우스의 전통에 따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바우하우스는 1920년대 예술과 건축의 기본원칙을 새로이 규명한 디자인학교이다. 바이마르대학 출신인 횔러링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는 포괄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 예술, 건축, 도시계획, 미디어 등을 통해 접한 내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횔러링은 또 바우하우스 초기세대들이 다루었던 구체적인 주제들이 아니라 이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살아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때그때 눈 앞에 놓인 시대적 도전들에 어떻게 맞서느냐가 관건이다."

얼핏 듣기에는 두루뭉술하고 진부한 표현 같다. 하지만 실생활에 응용된 구체적 사례 하나만 봐도 그 뜻이 훨씬 더 분명해진다. 폴리케어(PolyCare)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옌스 리히터(Jens Richter)는 바우하우스대학과의 협력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증언한다. 튀링겐에 소재한 폴리케어의 설립자들은 바우하우스대학의 전문가들과 손을 잡고 야심작을 개발했다. 바로 사막모래를 뭉쳐 만든 벽돌들로 쌓아 올린 집이다. 이 건축물은 레고블록으로 만든 집 같다는 첫인상을 주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 커다란 혁신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계에서는 활용이 불가하다고 생각해 온 소재인 사막모래를 과감히 사용한 것이다.

리히터는 “이 소재를 잘 활용하면 재난지역을 신속하게 재건할 수 있고 슬럼가의 주거환경도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나미비아 정부는 사막모래를 이용해 빈곤층을 위한 주택 2만5천 가구를 조성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막모래 주택은 영리한 기술, 기능성 높은 미학, 저렴한 건축 비용, 복지 차원의 필요성 등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도 이 건축물을 보았다면 매우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4대 교육원칙

1919년 봄 바우하우스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된 그로피우스가 선포했던 기본원칙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로피우스는 기본적인 형태와 색채에만 집중할 것을 설파했고, 다양함 속의 단순함을 추구했으며, 공간, 소재, 시간 그리고 자금 활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스마트폰에서 사무용 건물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거의 모든 생산품들이 추구하고 있는 바이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구 팬암 빌딩인 메트라이프 빌딩이 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구 팬암 빌딩인 메트라이프 빌딩이 있다. | 사진: © picturealliance / Arcaid
이러한 의미에서 부퍼탈 대학의 라이너 비크(Rainer Wick) 교수는 바우하우스가 중대한 지침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예술사학자이자 예술교육학자로서 바우하우스의 교육방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비크 교수는 바우하우스 설립자들이 결정적 요소들을 제시했다고 설명하며, 이에 내포되어 있는 4대 교육원칙을 열거한다. 첫 번째 원칙은 ‘무에서의 출발’이다. 학술적인 사전지식들을 벗어나 눈앞에 주어진 과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경험을 통한 학습’, 세 번째는 ‘시행착오’이다. 학생들은 구체적인 프로젝트들을 수행함으로써 각자의 능력과 재주를 발휘하고 연마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원칙은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는 수공예 교육과 대학 수업을 별개로 바라보던 인식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크 교수는 바우하우스가 인간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 다시 말해 인지 능력, 정서 능력, 운동 능력을 모두 고려하는 가운데 인간을 이해했다는 점이 매우 탁월하다고 말한다.

바우하우스 설립 이래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 많은 학교들이 바우하우스의 교육원칙을 따르고자 했지만, 그 중에는 살아남지 못한 학교들도 있다. 1953년 바우하우스의 졸업생 막스 빌(Max Bill)은 일부 디자이너와 예술가들과 함께 독일의 울름에 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을 설립했고, 전세계 학생들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1968년 재정적 어려움으로 폐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70년 오펜바흐 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Offenbach am Main)은 울름 조형대학의 교수학습 컨셉트의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다.

북미대륙으로 확산된 유산

바우하우스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들, 즉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들 덕분이었다고 비크 교수는 말한다. “그로피우스는 당대의 저명한 예술가들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후 바우하우스의 많은 마이스터와 예술가들이 나치 정권의 박해를 받았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바우하우스의 교육원칙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민길에 오른 교수들이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스웨덴, 남미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으로 전파했다. 1928년 바우하우스에서 물러난 그로피우스는 1934년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이후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건축가들과 함께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구 팬암 빌딩(Pan Am Building)인 메트라이프 빌딩(MetLife Building)이 있다. 그런가 하면 유명 사진작가이자 타이포그래피스트였던 헝가리 출신의 바우하우스 교수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는 같은 해 독일을 떠나 곧장 북미대륙으로 향했다. 시카고에 정착한 모호이-너지는 1937년 뉴바우하우스 대학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이 되었다. 뉴바우하우스는 현재 일리노이 공과대학 산하의 디자인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블랙 마운틴 컬리지로 거처를 옮긴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요제프 알베르스(오른쪽)
블랙 마운틴 컬리지로 거처를 옮긴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요제프 알베르스(오른쪽) | 사진: © State Archives of North Carolina Raleigh, NC
바이마르의 유산이 미국에 전파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블랙 마운틴 컬리지(Black Mountain College)의 예술가들이었다. 바우하우스 마이스터였던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는 1933년 거처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블랙 마운틴 컬리지로 옮겼다. 그러자 많은 예술가, 음악가, 학자들이 그곳에 합류했다. 이 학교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수업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었다. 이에 교수들은 이론이 아닌 실습을 학습의 중심에 두었고, 1940년대 들어 블랙 마운틴 컬리지는 예술뿐 아니라 경제학과 물리학까지 가르치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실력 있는 대학으로 우뚝 섰다. 그로피우스 같은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존 케이지(John Cage) 같은 음악가, 막스 덴(Max Dehn) 같은 수학자들이 이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1957년 블랙 마운틴 컬리지는 문을 닫아야 했다. 냉전의 바람이 불어 닥칠 때 이곳 사람들 중 일부가 공산주의 추종자라는 의심을 받으며 스폰서들을 잃은 결과였다.
 

“바우하우스의 전통은 용기와 책임을 가르치는 것”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학의 빈프리트 슈파이트캄프(Dr. Winfried Speitkamp) 총장 인터뷰

바우하우스대학의 차별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우리 대학은 아마도 독일에서 특정 아이디어와 양식의 흐름에 기반한 이름을 가진 유일한 대학일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전통을 가꾸고 유지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에 대한 질문들을 새로이 정립해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 학문, 디자인의 영역을 오늘날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도전들을 극복하는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국내외를 불문하고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지금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대학이 있는가? 혹은 그 전통을 기반으로 설립된 대학이 있는가?

당연히 많은 예술대학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 학교와 결연을 맺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미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이나 뉴욕의 프랫대학(Pratt Institute)도 비록 바우하우스의 전통만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분야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들은 특히 바우하우스의 유산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되고 있는지, 그 전통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들이 품었던 신념들 중 어떤 부분이 현재 구체적으로 교육현장에 반영되고 있는가?

교육의 원칙, 내용, 방식 등은 꾸준히 변화해 왔다. 하지만 기술과 수공업, 학술과 디자인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바라보고 이를 통합해야 한다는 기본 이념은 지금도 교육현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00년을 즈음해 대변혁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대두되었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이념 역시 이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시 대두되었던 청소년 운동이나 개혁주의 교육학, 자연치료요법, 채식주의, 전원도시 등 많은 개혁주의적 움직임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요즘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바우하우스의 전통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 혁신적 혁명적 발전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가?

바우하우스의 전통은 현재를 디자인함에 있어 용기와 책임감을 가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오늘날에도 해당하는 내용이다. 바우하우스는 향토보호운동이나 역사주의에 빠져 과거를 미화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현재 속에서 또 다른 현재를 고안하고, 그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는 것에 더 집중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결속에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우하우스대학이 구습을 타파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이끌어내는 선구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