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와 솔리스트
독일의 지휘자와 솔리스트들의 세계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 있어 가장 주목을 받는 대상은 지휘자와 솔리스트이다.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지휘자와 솔리스트들도 많다. 이러한 국제화 현상은 독일 음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은 콘서트나 오페라 공연이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히 개최되는 나라이다. 돈을 벌고 커리어를 쌓고자 하는 각국의 실력 있는 젊은 음악가들이 독일의 음악대학이나 오페라 및 공연 기획사 등을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인데, 이로 인해 독일 내 음악가들 사이의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현재 독일에는 공공 재정으로 운영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둔 시립 극장만 84곳에 이르고, 여기에 29개의 공연 전문 교향악단이 있다. 다시 말해 음악 총감독이나 수석 지휘자만 약 133명이다. 전문 및 아마추어 합창단 지휘자, 독립 챔버오케스트라나 구음악 및 신음악에 집중하는 특별 앙상블의 단장, 교회음악 감독, 관악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을 제외한 숫자가 그만큼이다. 클래식 음악회,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되는 정기 공연, 교회 연주회, 축제 등에 필요한 솔로 연주자에 대한 수요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오늘날 독일의 음악 문화는 국제화의 길을 걷고 있다. 예컨대 바트 키싱겐(Bad Kissingen)에서는 벌써 25년째 매년 독일 최대의 관현악 및 공연 축제 중 하나인 ‘키싱겐 섬머페스티벌(Kissinger Sommer)’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는데, 2010년 축제에 초청된 15명의 지휘자들 중 독일 출신은 3명 뿐이었고, 무대에 오른 50명의 피아니스트 중 9명만이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현재 국제 무대에 자주 서는 솔리스트나 지휘자들 중 상당수는 러시아, 라트비아, 영국 및 북유럽 출신이고, 최근 들어서는 성악이나 피아노 등 일부 장르에서 중국, 일본, 한국 출신의 음악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오케스트라 연습 혹은 무대에서의 의사소통 시 사용되는 언어는 주로 영어지만,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지휘자나 솔로 연주자들도 오래 전부터 국제 무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컨대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öst)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교향악단의 음악감독도 겸하고 있고, 크리스토프 에셴바흐(Christoph Eschenbach)는 워싱턴 국립 교향악단과 밀라노 라 스칼라에 이어 2019/2020 시즌에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을 예정이다.

음악가는 여행자다

과거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Christoph von Dohnanyi)는 클리블랜드의 음악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는 뉴욕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활약했다. 반대로 독일 최고의 오케스트라로에 외국 출신의 음악가들이 진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솔로 연주자와 수석 지휘자 등 주요 자리들을 세계 각국 출신의 음악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의 키릴 페트렌코(Kirill Petrenko)는 2019년 여름부터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 예정이고, 독일 내 방송관현악단 중 최고라 불리는 뮌헨 방송관현악단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가,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은 핀란드의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Jukka-Pekka Saraste)가 이끌고 있다. 함부르크, 베를린, 뮌헨의 대규모 오페라 극장들은 현재 각각 일본계 미국인, 아르헨티나와 러시아 출신의 감독들이 이끌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 하나로 꼽히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시절에는 독일의 주요 오케스트라를 독일 출신의 지휘자가 이끄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이것이 오히려 예외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음악계의 국제화는 사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각 분야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새로이 대두된 현상은 더더욱 아니다. 음악사적으로 보면 국가별로 구분되는 스타일이나 음악학파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계는 오래 전부터 국제성을 띠고 있었다. 적어도 15세기부터 음악가들은 언제든지 국경을 넘어 이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방랑객들’이었다. 자신의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이 많이 모인 곳, 많은 연주료를 약속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헨델은 독일의 할레 시에서 이탈리아와 영국으로 건너갔고, 모차르트는 젊은 시절 밀라노, 파리, 런던으로 연주여행을 다녔으며, 베토벤은 본에서 빈으로 움직였다.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로시니와 벨리니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다니며 활동했다. 수많은 거장들이 탄생한 19세기의 시기의 위대한 솔로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츠 리스트나 니콜로 파가니니는 오늘날 다니엘 바렌보임이 그렇듯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뿐 아니라 각 지역에 거처까지 마련해두며 음악활동을 했다.

‘젊은 직업’ 지휘자

지휘자는 음악직업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직종이다. 19세기 들어 시민들의 음악에 대한 욕구가 성장하면서 위대한 교향곡들이 탄생했고, 이러한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천 석 이상 규모의 웅장한 공연장과 오페라 극장들이 건축되면서 비로소 등장했다. 관현악단의 규모도 80-120명의 단원으로 확대되었다.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만 하지 않고 1817년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 서서 악보 꾸러미를 한 장씩 넘기며 지휘를 한 최초의 궁정악장들 중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이그나츠 폰 모젤(Ignaz von Mosel)은 1812년 지휘봉을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고,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는 1844년 최초의 악기학 이론서를 발간한 음악가이다.
 
초기의 지휘자들은 작곡가와 솔리스트 역할을 모두 한 이들이었다. 음악이론가나 비평가를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 업무의 세분화는 19세기 말 무렵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가 최초의 ‘전업’ 음악비평가로 활약하고,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ülow)가 궁정악장이라는 제한된 지위에서 벗어나 각국을 순회하는 스타 지휘자로서 활약을 보이면서 비로소 전업 지휘자라는 직종이 탄생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슬리크는 무대 위에서 리스트와 함께 피아노 이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피아노 실력도 뛰어났다. 한스 폰 뷜로우 역시 이따금씩 피아니스트나 작곡가로서도 활동했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였던 뷜로우에게서 지휘봉을 넘겨받은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도 전문 교육을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그 후임자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역시 대형 교향곡을 쓰는 일을 가장 즐겼고 자신의 본업은 작곡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등장하면서 완전한 전업 지휘자의 시대가 열렸다.
 
작곡을 전공한 후 피아니스트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카라얀은 젊은 지휘자 양성을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삼았다. 지휘를 전공하는 이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최초로 개최한 이도 카라얀이었다. 그는 이 외에도 보조 지휘자를 두는가 하면 1969년 최초의 지휘 콩쿠르를 조직하기도 했다. 카라얀 재단이 주관하는 이 콩쿠르를 통해 직업 음악인으로 데뷔한 지휘자만 해도 700명이 넘는다. 발레리 게르기예프(Valeri Gergiev)나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역시 이에 속한다. 하지만 1984년 카라얀 콩쿠르의 심사위원단이 카라얀의 의견을 무시하고 크리스티안 틸레만(Christian Thielemann)을 탈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회규칙에 명시된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콩쿠르는 영원히 폐지되고 말았다. 독일음악협회(Deutscher Musikrat)는 그로부터 6년 뒤 마스터클래스 개최와 장학금 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지휘자 포럼(Dirigentenforum)’을 조직했지만, 카라얀 콩쿠르의 빈 자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일부 진지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2004년 밤베르크에서 최초로 개최된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였다. 제1회 대회의 우승자는 현재 LA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인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의 이름을 딴 지휘 콩쿠르가 조직되었다. 심사위원단의 구성 면에서나 상금 면에서나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 대회는 2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데, 아쉽게도 지금껏 입상한 사람들 중 이렇다 할 경력을 쌓은 이는 아무도 없다.

지회대회는 발판?

독일에서 개최되는 지휘 대회에서의 수상 경력이 지휘자로서의 탄탄대로를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솔로 악기연주 부문은 더더욱 그러하다. 독일 솔리스트 공쿠르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입상 경력이 성공의 발판이 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국가에서 개최되는 국제 대회에서의 입상이 국제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례들도 있다. 브뤼셀에서 개최되는 퀸 엘리자베스 바이올린 콩쿠르나 바르샤바의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연주자라면 대규모 무대로부터 공연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에 반해 독일에서 개최되는 루이 슈포어 콩쿠르나 드레스덴 바이올린 콩쿠르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자그마한 계단 하나에 불과하다. 현재 각 장르의 청년 솔리스트들을 발굴하기 위해 개최되는 독일 콩쿠르 중 가장 비중 있는 대회는 뮌헨에서 열리는 ARD 음악 콩쿠르이다. 2006년 시작된 베히슈타인 피아노 콩쿠르는 브뤼셀, 볼차노, 바르샤바, 모스크바 등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 피아노 대회들과 발을 맞추기 위한 시도로 조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음악가들도 영재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고 있다. 각종 국제 무대를 누비고 있는 걸출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네-조피 무터(Anne-Sophie Mutter)를 비롯해 많은 음악가들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앞서 말했듯 국제 음악계는 이른바 ‘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라마다 고유한 음악학파들이 남아 있다. 한편 그 음악적 전통들이 실제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헛된 신화에 불과한지를 둘러싼 논란은 뜨겁다. 사실 지금도 러시아의 이름난 피아노 교사 겐리프 네우가우스 제자의 제자들, 러시아의 전설적 피아노학교 출신들의 마지막 멤버들이 각종 대회를 휩쓸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푸르트뱅글러가 공들여 발전시키고 카라얀이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독일의 소리’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Leipziger Gewandhausorchester)이나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Staatskapelle Dresden)을 비롯한 독일 관현악단들에 의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으며, 틸레만이나 바렌보임 같은 지휘자들이 소중히 가꿔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