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안전한 공간
세상으로부터의 휴식

(더) 안전한 공간: 안전한 장소, 지역, 공간은 많은 소외 그룹들이 차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서로 교류를 하기 위해 중요하다. 오늘날 (더)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공간이라는 것은 100 퍼센트 안전할 수 없고, 우리는 공간을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안전한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 나의 안전한 공간은 바로 나의 침실이다. 길이와 너비가 2m씩으로 내 침대가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창문이 하나 있지만, 나의 침실은 항상 어두컴컴한 잠자기용 굴이다. 아무도 안을 들여다볼 수도 밖을 내다볼 수도 없는 곳으로, 누구를 방으로 들일지는 오직 나만 결정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러한 결정권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게 느끼는지는 여러 가지 요소에 달려 있다. 나는 길을 갈 때 신체적인 위협을 받을 걱정을 하지 않고,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장애여성으로서 내가 머무는 곳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 모든 곳에는 언어적 대립이 일어날 높은 가능성이 도사린다. 한 사람이 이러한 대립을 얼마나 자주 마주하게 되는지는, 그 사람이 외부로부터 어떻게 인지되는지, 그의 신체가 사회가 정의하는 기준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외부인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안전하다면, 아주 제한된 특정 공간에서만 안전할 것이다.

안전한 공간의 원래 의미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물리적인 보호 공간이다. 역사적으로는 1960년대에 미국의 퀴어계가 성소수자들끼리 모여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서 형성된 개념이다. 2차 여성운동 때 생겨난 안전한 공간들의 목적도 이와 비슷했다. 남성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여성들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가부장적 구조의 간섭 없이 자신들의 경험, 바람, 목표를 교류할 수 있는 공간들이 생겨났다.

오늘날에는 예를 들어 축제나 행사가 벌어지는 곳에서 안전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안전한 공간은 때로는 은둔해 있을 수 있는 소파들이 있는 어두컴컴한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학교의 감독 하에 차별 대처에 관한 도움을 받고, 교류하고, 기술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전한 공간은 언어적 상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곳이다. 사람들에게 일상 속 평가로부터 휴식을 제공하기 위한 곳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에는 다른 곳에서와는 전혀 다른 신체, 기준, 능력에 대한 기본 인식이 깔려 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모두가 같은 차별 형태, 즉 장애인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서로 불균형한 권력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현실에서는 이것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피해자들도 차별구조를 이미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안전한 공간과 관련해 나는 때로는 우리가 서로를 비교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장애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낮게 혹은 높게 평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는 장애가 있지만, 적어도 저 사람만큼은 아니다.” 장애가 없는 몸이 더 나은 몸이라는 생각이 우리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끼리’ 있을 때조차 ‘밖’에서 배운 권력구조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한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안전한 공간이 동시에 성소수자나 유색 인종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소수자 혐오를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에 면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개념에 ‘더’를 덧붙여 ‘더 안전한 공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공간을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더) 안전한 공간이라는 콘셉트는 최근 몇 년 동안 언론에서 계속해서 비판을 받았다. 대학계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학술적 자유에 위배되며,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회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안전한 공간에 대한 반론으로 ‘희생자 문화’를 언급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이미 소외된 사람들 중 ‘불편한 말’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만드는 그런 희생자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안전한 공간이라는 존재가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킬 뿐이라는 반론도 계속해서 제기된다. 사회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진정한 포용을 저해하는 일로, 보호받는 공간이 아닌 넓은 사회 안에서 토론이 진행되어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논지다. 결국 우리가 그들 앞에서 ‘숨는’ 대신 그들과 함께 일할 때에만 사회는 변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더) 안전한 공간은 숨는 개념보다는 휴식의 시도를 의미한다. 차별은 우리가 그 앞에서 눈을 감게 되는 때때로 마주하는 의견이 아니라, 우리를 상시 지배하는 피할 수 없는 권력체제다. 여러 차례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적인 교육 작업을 벌인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든, 이들은 계속해서 대화에 참여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 앞에서 숨는 것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면에는 노력이 뒤따르고, 우리가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이 있듯 마찬가지로 우리가 쉬어도 되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 내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은 나의 작은 침실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 있고, 그 누구도 나를 인지하지 못하는 곳이다. 바로 이것이 많은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유다.  혼자 있으면 그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공간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볼 것인가? 작은 관점에서 우리는 평가를 최소화할 수 있을 만큼 차별에 민감한 친구들을 찾음으로써 이러한 공간을 직접 만들 수 있다. 큰 관점에서 더 안전한 공간은 최소한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이라고 덜 힘들게 만드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