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이해하기: 아렌트 정치철학의 시의성

한나 아렌트 인터뷰 1부 © Eléonore Roedel

2025년 12월 4일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서거 50주기를 맞이한 날이며, 2026년은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체주의 및 정치 행위에 관한 이론으로 잘 알려진 독일계 미국인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의성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대인인 그녀는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망명해야 했고, 나치즘이라는 문명적 파국을 깊이 성찰했다. 아렌트는 정치와 인간이 공존할 때, 사람들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의미 있게 행동하며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고 이해했다. 그녀가 지금까지도 중요한 사상가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한나 아렌트 전문가인 서유경 교수와 함께 아렌트의 사상이 지닌 의미와 그것을 매개하는 방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교수님께서는 어떤 맥락에서 처음 한나 아렌트를 접하게 되셨는지요? 아렌트의 사상과 작업 전반에 관하여 이토록 집중적인 연구를 하게 된 계기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습니까?  
1996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개설된 <현대 정치철학 세미나> 강의를 통해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만나면서 아렌트의 정치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결국 박사논문의 주제로 한나 아렌트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줄곧 한 사람의 헌신적인 ‘아렌트주의자(a devoted Arendtian)’로서 아렌트 연구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저의 책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은 저의 지난 30년 연구의 결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렌트를 아직 접해보지 않은 독자에게 그를 소개하려면, 아렌트의 스승 두 명과 관련된 일화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27년, 아렌트의 첫 스승인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의 대표작인『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출간했습니다. 그것을 읽은 아렌트의 또 다른 스승인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제자인 아렌트에게 “이 책에는 신(God), 세계(The world), 소통(Communication), 이 세 가지가 없군”이라고 촌평했다고 합니다. 그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세계(the public realm)와 소통(communicative action)을 중심으로 수립되었다는 점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아렌트는 세계와 소통을 통해 현대 숙의민주주의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치철학을 제시했다는 점을 꼽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아렌트는 새로운 정치철학을 제시함으로써 스승인 하이데거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아렌트 정치미학> 강의를 비롯하여, 정치적 행위, 시민적 불복종 등 아렌트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세미나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강의에서 학생들은 아렌트의 주요 논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수업 현장에서 논쟁적으로 제기되거나, 영감을 주는 쟁점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 독자 전반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떤 인상을 받으시는지요? 아렌트의 개념들 가운데 한국의 독자가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무엇이며, 상대적으로 낯설게 받아들이는 개념이나 논점은 무엇입니까?
최근 학술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후, 학부에서 <아렌트 정치미학> 강의를 들은 학생 두 사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자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교수님, 한국정치학회 2025 학술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후마니타스학과에 입학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강의가 교수님의 아렌트 정치미학 강의였습니다.”라고 했고, 다른 한 졸업생은 “교수님, 2025 학술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미학 수업은 이십 대부터 지금까지의 학부 수업 중 단연코 최고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자를 받을 때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강의하는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대학원의 <시민정치철학세미나>에서는 아렌트의『혁명에 관하여(On Revolution)』와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를 중심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및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해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생들도 종종 아렌트를 통해 새로운 ‘시민정치철학’이라는 분야에 입문하게 되어 기뻐합니다.  

아렌트의 개념들 가운데 한국의 독자가 특히 공감하는 부분이라면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개념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문구가 유명세를 탄 덕분에『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한글판이 꽤 많이 팔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은 독자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낯설게 받아들이는 개념이나 논점이라면 아마도 아렌트의 ‘의사소통 활동으로서의 정치’나 ‘의사소통 행위로서의 정치 행위’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현대 사회에서는 고대 그리스적 ‘정치’ 대신 현대 행정국가의 나라 살림, 즉 ‘행정’이 ‘정치’로 오인되고 있으니까요. 이는 지난 20세기 미국식 행태주의(behavioralism) 정치학을 공부한 정치학 교수들이 국내의 각 대학에서 도구주의와 결과주의에 기초한 ‘정량적’ 정치를 유일한 정치 양태로 공인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21세기는 탈근대(Postmodernity), 후기-근대(Late modernity),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 탈도구주의(De-instrumentalism), 심미적 전환(Aesthetic turn)과 성찰적 태도(Reflective attitude)와 같은 어휘들을 통해 설명됩니다. 아렌트의 ‘정성적’ 정치 패러다임은 이러한 어휘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문제는 이러한 어휘들이 아직 일반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단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 정치가 확산함에 따라, 최근 독일에서는 전시, 출판, 토론 등을 통해 아렌트의 사상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정치적으로 격동적인 한 해를 보냈습니다. 아렌트의 이론은 현재 한국 사회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한국이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는 데 아렌트가 제시할 수 있는 통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울러 아렌트와 그의 사상이 전 세계적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최근 독일에서 아렌트의 사상이 활발히 논의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실 저는 BBC, CNN, France 24와 같은 국제 뉴스 채널을 종종 시청합니다. 독일 상황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지난 선거에서 극우 정당과 극좌 정당이 대단한 선전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렌트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의견을 통해 ‘인간으로서 자신의 구별성과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상황이라고 말할 것 같으니까요. 다양한 의견이 공적인 공간에서 표출된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또 무엇이 더 아름답고 덜 추한지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2024년 12월 3일 ‘계엄’ 발동 시점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날 밤 국회에 투입된 젊은 군인과 경찰들의 ‘소극적’ 임무 수행 방식은 아렌트가 새로운 정치철학을 집필해서 설파하고자 했던 ‘사유의 정치적 유의미성’이 증명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 젊은 군인과 경찰은 영문도 모른 채 국회의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와 중간 간부 일부는 상부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필시 그들은 ‘1980년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며, 그것의 불행한 교훈을 복기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1980년 광주’라는 사건은 제가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에서 새롭게 개념화한 ‘아렌티안 아르키메데스 점(an Arendtian Archimedean point)’으로 소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나 빌라(Dana R. Villa)의 용어 ‘하나의 무토대적 토대(a groundless ground)’를 빌어 이 개념을 사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에 투입된 다수의 계엄군과 경찰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과는 달리 ‘악의 평범성’을 타파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찾아온 재앙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아렌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유함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다루며, 부재하는 것의 재현물들을 다룬다. 반면에 판단함은 항상 특수한 것들과 손에 닿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 [사유함과 판단함이라는] 양자는 의식과 양심이 서로 연계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판단 능력이 [우리 삶 속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결단의 순간들에 적어도 나 자신을 위해서만큼은 커다란 재앙들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 저/ 서유경 역, [책임과 판단] , p. 341)

방금 설명했듯,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무한한 ‘이론적 확장성’과 ‘설명력’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렌트의 사상에 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전 학문 분과로 계속 확장되리라 전망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렌트는 우리 삶의 기본 문법을 다시 쓰는 ‘패러다임 전환(a paradigm shift)’을 시도했고, 그것의 효과가 20세기 후반의 잠복기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서며 급격히 가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다양한 의견과 소통 능력이 판단력의 기본 조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는 정치적 권리와 자유, 평등을 요구했으며, 이는 오늘날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는 가치입니다. 특히, 언론 자유가 위협받고, 언어가 거칠어지며, 소셜 미디어를 통한 양극화가 심화하는 시대에서 말입니다. 디지털 여론의 영향력이 커지는 한국 사회에서, 아렌트의 ‘다수성’ 및 ‘소통’ 개념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아렌트가 이론화한 이상적인 정치의 장(the political realm), 즉 ‘아렌티안 폴리스(the Arendtian polis)’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소통되고 판단되는 공적인 숙의의 공간입니다. 이러한 공간은 시민의 정치적 권리로서 발언의 기회가 보장되고, 발언을 통해 시민이 자신의 자유를 구현하며, 다른 참여자들의 발언 기회도 보장하는 ‘정치적 평등’이 구현된 장소라는 성격을 띱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그 어디에도 이러한 ‘이상적’ 공론장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점은 아렌트가 강조한 인간의 실존 조건인 인간다수성(Human plurality)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각기 ‘단독적 다수의 있음(being-singular-plural)’의 형태로 살아갑니다. 이는 ‘각각의 단독성이 그것의 다수와-함께-있음(its being-with-many)과 분리될 수 없는 방식’(Nancy 2000, 32)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렌트의 저서『인간의 조건』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 각자가 ‘동등인들 속에서 구별되는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렌트가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설득하는 것만 같습니다.    

인터뷰: Leslie Klatte(레슬리 클라테)
교정: 추영롱
영어 번역: STAR Korea AG
독일어 번역: Kathrin Hadeler(카트린 하델러)

서유경
서유경 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과 이론을 연구하는 정치철학자이며,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대학원 학과장에 재직 중이다. 영국 켄트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서울 경희대학교에서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사상학회 등 주요 기관에서 학자로서 다양한 직위를 역임하였다. 국내외에서 아렌트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아렌트의 저작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과거와 미래 사이』, 『책임과 판단』, 그리고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2025년에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을 출간하였으며, 해당 저서의 영문판은 2026년에 슈프링어 네이처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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