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Memories:
기억의 변화를 사유하는 작가 지븨리와의 대화

GASAG Art Prize 2026 수상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이뤄낸 작가 지븨리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시각예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형성된 그녀는 기억, 시간, 흔적이라는 개념을 물질과 공간을 통해 섬세하게 탐구합니다. 특히 최소한의 형태 속에 축적된 시간성과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며, 관람자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서사를 감각하게 합니다. 설치, 조각, 이미지 연작을 넘나드는 그녀의 작업은 물질에 새겨진 기억과 인간 존재의 관계를 시적으로 풀어냅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그녀의 예술 세계는 더욱 확장된 맥락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Jeewi Lee Portrait © Ecaterina Rusu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설치, 조각, 이미지 연작, 장소 특정적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 지븨리입니다.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성장했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업은 흔적, 덧없음, 그리고 물질에 새겨진 기억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공간과 시간, 인간의 존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특히 ‘흔적(Spur)’이라는 개념은 저의 작업에서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이는 발자국이자 기억이며, 역사이자 물질적 잔여물로서 이해됩니다. 흔적은 종종 최소한의 형태를 띠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를 품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과거와 현재,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며 공존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동시성이 저를 매료시킵니다.

작가님의 작업에는 기억, 시간, 흔적, 그리고 덧없음과 같은 핵심 개념들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게 된 개인적이거나 예술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주제들은 제 개인적인 서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동, 이주, 그리고 서로 다른 장소 사이를 살아가는 경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응축됩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물질이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물질에 새겨지고, 흔적은 어떻게 남거나 사라지며, 부재는 또 어떻게 존재만큼이나 강하게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합니다.

재료와 공간은 종종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모래 위의 흔적이나 비누에 남은 자국은 이미 일어난 행위의 증거입니다. 그 흔적이 만들어낸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즉 ‘지표성’은 저를 매료시킵니다. 흔적은 시간을 증언하는 조용한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설명하며 이를 “그것은-거기에-있었다(Es-ist-so-gewesen)”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확실성, 흔적 역시 바로 그러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는 개념을 통해, 어떤 대상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와 가치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그 대상이 지나온 역사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여기와 지금(Hier und Jetzt)’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입니다. 존재와 부재 사이, 무언가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순간. 그것은 일종의 부유 상태이며, 저에게 매우 실존적으로 가까운 감각입니다.

여러 문화와 장소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저는 일찍이 파편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반복된 이사, 뿌리내리지 못한 시간과 다시 돌아오는 경험들이 저의 인식을 형성했습니다. 이주는 기억이 끊임없이 단절되는 경험을 동반합니다. 이후 저는 왜 모래 알갱이나 갑오징어의 내부 껍질처럼 ‘유목적인’ 오브제들에 감정적으로 끌리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제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님의 프로필을 보면 한국과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시간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과 예술 교육 환경에서의 경험이 선생님의 시각적 언어와 작업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서로 다른 문화적·교육적 환경은 제 작업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재료와 현상, 그리고 도교와 같은 철학적 개념이나 ‘정’, ‘인연’, ‘한’과 같은 정서적 개념들로부터 영감을 받습니다. 독일에서는 사고가 보다 개념적이고 과정 중심적으로 발전했으며, 미국에서는 제 정체성과 개인적 서사를 깊이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간 경계를 넘나든 경험은 제 시각적 언어에도 영향을 주어, 일종의 시각적 환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정 문화에 과도하게 규정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공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합니다. 저에게 미니멀리즘은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예술 프로젝트 소개

모든 작업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겠지만, 작가님께서 꼭 소개하고 싶으신 작품 세네 점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작이거나,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작품들이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당시 작가로서 어떤 질문을 던지고자 하셨는지도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려운 선택이지만, 다음과 같은 작업들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Fundament (토대, 2014):
베를린예술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졸업 작업이자 제 작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입니다. 2미터가 넘는 작업실 바닥 일부를 그대로 떼어낸 것으로, 수년간 덧칠되고, 얼룩지고, 긁히며 축적된 제 학업 시기의 흔적이 담긴 일종의 아카이브입니다. 학교를 떠날 당시, 마치 발밑의 기반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고,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의 바닥’을 그대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이 작업은 “부재는 어떻게 형태가 될 수 있는가?”, “과거는 어떻게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Fundament는 대학에서의 시간을 응축한 은유적 작업이자, 동시에 이후 제 작업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FUNDAMENT

FUNDAMENT | © Jeewi Lee

〈Past Tense〉(과거 시제, 2016–현재):
이 시리즈는 Fundament에서 출발하지만, 시선을 한국으로 돌립니다. 저는 오래된 한옥에서 사용되던 전통 종이 바닥인 한지로 된 장판을 사용하며, 종종 새로운 바닥으로 교체하는 대신 기존 바닥을 받아 작업에 활용합니다. 저는 시간이 어떻게 물질에 새겨지는지에 깊은 흥미를 느낍니다. 온돌의 열기, 햇빛, 가구 자국, 불에 그을린 흔적 등 한국의 일상문화가 문자 그대로 그 재료 안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용된 종이들은 저에게 회화적이고 드로잉적이며, 거의 사진적인 잠재력까지 드러냅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신체, 친밀함과 기억을 담고 있는 조용한 증인입니다. 한국인 작가로서 저는 관람자의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동시에 제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은유적인 시선을 유도합니다. 〈Vor·wurf〉(흔적, 2021):
한국의 문화와 제 가족사를 다룬 3부작 설치 작업으로, 특히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 있는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용감하면서도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그를 이해하고,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저는 하동의 폐가가 된 그의 집을 찾아갔고, 결국 그의 방을 베를린으로 옮겨왔습니다.

그의 방에 있던 벽지는 벽과 천장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펼쳐진 큐브 전개도 형태의 설치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저에게 벽은 인간의 ‘두 번째 피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있었고, 이제는 그의 삶을 담고 있는 아카이브로 기능합니다. 벽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 겹의 벽지 사이에 숨겨져 있던 개인적인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덧붙여진 층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작은 그림들, 부적, 작은 종이에 적힌 다짐들이었습니다.

작업의 두 번째 부분은 그 집에서 발견한 일상적 사물들로 구성됩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이 물건들은 모두 브론즈로 주조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벽에 걸려 있던 시간의 증인들입니다. 여기에 더해, 전시장에 사용된 울트라마린 블루를 블루스크린처럼 활용하여 브론즈 조각들을 삽입한 영상 작업도 함께 제작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Vor·wurf」는 하나의 잔향을 의미합니다. 어떤 선행된 것으로부터 비롯되어 남겨진 흔적을 가리킵니다. 〈Encounter (Future Past Tense)〉(조우 (미래 과거 시제), 2023–현재):
이 작업은 갑오징어의 내부 껍질, 즉 ‘세피아 슐페(Sepien-Schulpen)’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들은 죽은 뒤 수개월 동안 바다를 떠다니며 이동의 흔적을 축적하고, 결국 해안으로 밀려와 우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브제는 시간과 이동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물질이 지닌 취약함과 동시에 강인함이 공존하는 상태에 매료됩니다. 이처럼 섬세한 대상이 해류와 파도를 거치는 긴 여정을 거의 손상 없이 견뎌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유목적인 성질을 드러냅니다. 이는 제가 한국의 해안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설치 작업에서 저는 이 내부 껍질에 구리를 전기 도금하여 그 형태와 흔적을 보존했습니다. 그 결과 미래적인 인상을 띠게 된 이 오브제는 과거와 미래 사이, 원초적인 자연 형태와 사변적인 미학 사이의 대화를 형성합니다.  

재료,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 그리고 예술적 과정

작가님의 작업에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일상적 재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재료들은 주로 개념적인 사고에서 출발해 선택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물질과의 우연한 발견이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첫 번째 아이디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실제 설치 작업으로 구현되기까지,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함께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님의 작업에는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일상적 재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재료들은 주로 개념적인 사고에서 출발해 선택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물질과의 우연한 발견이나 만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첫 번째 아이디어의 출발점에서부터 실제 설치 작업으로 구현되기까지,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함께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에게 그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입니다. 때로는 개념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작업은 물질과의 만남, 관찰, 혹은 어떤 매혹의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모래, 재, 비누, 종이 바닥과 같은 재료들은 시간과 역사, 문화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험과 장소에 기반한 리서치를 통해 아이디어는 점차 구체화되며, 그 과정은 열려 있습니다. 즉, 재료 자체도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예를 들어 비누는 그 이중성 때문에 흥미로운 재료입니다. 일상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강하게 작동하는 물질로, 스스로 용해되고 사라집니다. 비누는 역사적으로 볼때 본래 재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이 재는 하나의 끝이자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비누는 정화와 흔적의 소거를 상징합니다. 재는 어떤 것이 사라지기 직전에 남는 마지막으로 단단하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자, 동시에 비옥한 비료로서 이미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끝의 상태’입니다.

모래 역시 저를 매료시키는 재료입니다. 각각의 모래알은 엄청난 시간과 이동의 경로, 그리고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한때는 산이나 암석의 일부였던 것이 수백만 년에 걸쳐 모래가 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래는 그 크기로 정의될 뿐입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조개 껍데기의 잔해, 광물, 혹은 미세 플라스틱이 드러나며, 각각의 해변과 해안은 고유한 색과 물질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의 작업 과정은 주로 관찰과 실험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실제 설치 작업은 현장에서 비로소 형성됩니다. 어느 순간 재료, 공간, 개념이 하나로 맞물리는 지점이 나타납니다. 많은 부분은 작업실에서 미리 결정할 수 없으며, 장소의 정령(genius loci), 공간적 조건, 그리고 그 장소가 지닌 역사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장소 특정적 설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Impianto, Einschlag과 같은 작품들은 건물 내부, 야외 공간, 해안 등 서로 다른 공간적 맥락 속에서 각각 개발되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실 때, 작업의 장소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업의 적극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작업은 초청을 통해 시작되기도 하고, 우연히 마주한 공간의 역사와 긴장감에서 출발하기도 합니다. 저는 항상 그 지역적 맥락을 깊이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작업의 형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여러 장소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저의 개인적 경험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Einschlag(충돌, 2018)은 뮌헨의 옛 방공호 BNKR에서 제작된 작업입니다. 전시 전에 속이 빈 강철 구를 강한 힘으로 콘크리트 벽에 반복적으로 충돌시켰고, 변형된 ‘철거용 추’는 이후 공간에 매달린 채 전시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방공호가 지닌 폭력적인 역사와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장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Einschlag

Einschlag | © Jeewi Lee

또 다른 예로 Impianto(기반)는 피렌체에서의 빌라 로마나 장학 프로그램 기간 동안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적 건축물과 조각의 복원 작업을 보며, 저는 건물의 ‘흠집’을 가시화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빌라 로마나 건물에서는 파손된 부분을 정교하게 맞춘 대리석으로 채워 넣어, 과거의 흔적을 감추는 대신 오히려 미학적으로 드러냈습니다.
Impianto

Impianto | © Jeewi Lee

탁본, 프린트, 심플한 반복 구조

작가님의 설치 작업 사이사이에는 프로타주나 판화 형식의 작업들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평면 작업들은 설치 작업의 확장으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기록하고 아카이브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체계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둘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타주와 판화 작업은 독립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더 큰 전체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프로타주는 흔적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는 평소에는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표면과 구조를 가시화하며, 부재, 물질성, 기억에 대한 제 설치 작업의 질문을 확장시킵니다.

예를 들어 Inzision (절개, 2018)은 한국의 38선을 따라 진행된 작업입니다. 이 선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서 분단의 아픔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나무들을 선택했는데, 이 나무들은 역사의 조용한 증인처럼 존재합니다. ‘탁본’ 기법을 사용해 솜뭉치와 먹으로 나무의 표면을 한지에 옮겼고, 이렇게 만들어진 흑백 이미지는 마치 나무들의 초상 혹은 지문처럼 보입니다. 판화 작업과 더불어, 여정과 만남, 대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아티스트 북도 함께 제작되었습니다. 전시에서는 이러한 Inzision 이미지들과 함께, 흰색과 어두운 자갈로 구성된 대형 바닥 설치 작업 Fraktur(단절)가 함께 선보였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Drape of Wisdom(지혜의 장막, 2020–2021)은 세네갈에 있는 850년 된 바오밥 나무를 탁본한 연작입니다. 이 작업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식 체계를 연결합니다. 탁본은 전통적으로 목조 조각이나 묘비 등에 새겨진 정보를 복제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기술입니다. 저는 이 ‘생명의 나무’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초상화하고, 이야기와 선택의 축적체로서의 역할을 종이에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반복되는 단순한 형태와 비움을 기반으로 한 구성은 해석의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깁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환원’ 혹은 ‘절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환원은 단순한 형식적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각적 과잉에 대한 하나의 대항점이며,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미학적으로 저는 최소한의 제스처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는지, 그리고 단순한 형태가 얼마나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정확하게 배치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반복은 이러한 강도를 더욱 증폭시키며, 시선이 속도를 늦추고 보다 면밀하게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개념적으로 저는 개방성과 해석을 열어두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제 작업이 관람자의 연상과 해석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비움과 채움은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저는 양가성을 지닌 재료를 즐겨 사용합니다. 그 예가 옻(우루시, Urushi lacquer)입니다. 액체 상태에서는 독성을 지니지만, 건조되면 한국 문화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견고한 재료가 되며, 역설적으로 습하고 따뜻한 환경에서만 건조됩니다. 이러한 취약함과 강인함,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의 중간 상태는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이는 제가 아시아적 철학과 연결 짓는 공존의 방식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GASAG Art Prize 2026 수상

GASAG Art Prize 2026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작가님의 작업 가운데 어떤 점이 심사위원들에게 특히 인상 깊게 다가갔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번 수상의 일환으로 베를린니셰 갤러리(Berlinischen Galerie)에서 선보이게 될 새로운 설치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예정인지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베를린니셰 갤러리에서는 오는 9월, ‘모래’를 주제로 작업을 더욱 발전시킬 예정입니다.

기존 작업인 Fragment (모래 조각)과 Field of Fragments (모래 드로잉/회화)을 확장하는 한편, 협업 파트너인 Phillip C. Reiner(필립 C. 라이너)와 함께 새로운 재료를 실험한 신작들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또한 Thorsten Kosellek(토르스텐 코젤렉, 조명 디자이너)과 Jared Meier-Klodt(재러드 마이어-클로트, 사운드 작업가)와의 협업도 전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룰 예정입니다. 전시를 앞두고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예술과 AI

작가님의 작업은 물질성, 흔적, 그리고 감각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이는 인공지능으로는 쉽게 대체되기 어려운 영역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에서 AI 기술의 확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AI를 창작 도구나 연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지, 혹은 비판적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고 계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계신지도 함께 여쭙고 싶습니다.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작업을 점점 더 가속화되는 디지털화에 대한 하나의 의식적인 대응으로 보고 있습니다. 재료와의 물리적 만남, 공간 속에서의 존재감, 촉각적인 경험은 AI로 대체될 수 없는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저는 AI의 발전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의성, 저자성, 그리고 창작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AI를 주로 리서치나 조직적인 업무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Field of Fragments 프로젝트에서는 Phillip C. Reiner, 그리고 ZEISS Messtechnik GmbH(자이스 측정기술 유한회사)와 협력하여 모래 입자를 엑스레이 현미경으로 스캔하고 3D 모델을 제작하는 등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적 요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예술의 핵심은 감정적이고 시적인 차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업은 물질과의 물리적인 관계에 깊이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AI를 창작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려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영감

앞으로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장기적인 예술 프로젝트나 연구 주제가 있으신가요? 또한 다시 한국에서 전시를 하게 된다면, 특히 작업해보고 싶거나 예술적으로 탐구해보고 싶은 공간이나 장소가 있으신지도 궁금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시간, 덧없음, 기억에 대한 탐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새로운 물질적·공간적 관계들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어떻게 전해지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형되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한국의 오래된 지식, 전통적인 의례와 지혜에도 점점 더 끌리고 있습니다. 제 노트에는 앞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 싶은 주제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미래의 기억(future memories)’이라는 개념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이해할 때에만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끝에는 시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불사조나 중국의 화조(火鳥)와 같은 이미지처럼, 파괴와 재생의 원리는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행위는 미래 속에서 하나의 울림으로 남게 됩니다.

한국에서의 전시에 대해서도, 다시 그곳에서 작업할 수 있다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저는 변화와 전환의 복합적인 역사를 지닌 장소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업 폐허, 도시와 자연의 경계에 있는 공간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성과 공간 감각이 살아 있는 전통 건축 공간 등이 그 예입니다.


프로젝트 기획 및 인터뷰: 신소희
편집 및 교정: 레슬리 클라테(Leslie Klatte)
한국어 번역: 신소희
영어 번역: 레슬리 클라테(Leslie Kla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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