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는 과거가 아니다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Ruin》2026년 5월 9일~11월 22일
 

Venice Biennale 2026 © Victoria Tomaschko

1895년에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미술 행사로 꼽히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올해로 제61회를 맞았습니다. 90여 개국이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 주류 서사에서 밀려난 목소리들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기획한 큐레이터 코요 쿠오(Koyo Kouoh)가 개막 1년 전 작고했습니다. 카메룬 출신으로 비엔날레 역사상 아프리카 여성 큐레이터로는 최초였습니다. 그리고 그 애도는 독일관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참여 작가 헨리케 나우만(Henrike Naumann)이 올해 2월, 개막 석 달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유작을 동시에 선보인 올해 비엔날레는 그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개막했습니다.

Artists Henrike Naumann and Sung Tieu, and curator Kathleen Reinhardt for the German Pavilion at the 61st Venice Art Biennale.

Artists Henrike Naumann and Sung Tieu, and curator Kathleen Reinhardt for the German Pavilion at the 61st Venice Art Biennale. | © Victoria Tomaschko

한여름 베니스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수상버스가 물살을 가르며 자르디니 선착장에 닿자, 도시의 밀도가 서서히 풀린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각국 파빌리온의 지붕들이 드러나고, 그중에서도 크고 육중한 독일관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전시장에 가까이 다가서니 외벽을 덮은 수십만 개의 작은 타일이 촘촘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 작은 픽셀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며 얼룩진 낡은 아파트 벽면을 연상시킨다.

올해 독일관을 채운 전시《폐허(Ruin)》는 큐레이터 카트린 라인하르트(Kathleen Reinhardt)가 기획하고, 헨리케 나우만과 성 티우(Sung Tieu) 두 작가가 참여했다. 나우만은 동독 츠비카우(Zwickau) 출신으로 가구와 인테리어를 통해 동독의 정치적 급진화와 역사를 탐구해온 작가다. 티우는 베트남 하이즈엉(Hải Dương) 출신으로 독일에서 성장했으며, 국가 제도가 어떻게 신체를 분류하고 배제하는가를 추적해왔다. 두 작가의 작업 모두 동독과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 다른 방향에서 같은 지형을 건넌다.

파사드 위의 다른 역사

Sung Tieu, Human Dignity Shall Be Inviolable, 2026. Courtesy the Artist.

Sung Tieu, Human Dignity Shall Be Inviolable, 2026. Courtesy the Artist. | © Andrea Rossetti

먼저 성 티우는 독일관 외벽을 300만 개 이상의 대리석 모자이크 타일로 덮어, 베를린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지역에 있는 게렌제 거리(Gehrenseestraße)의 단지를 재현했다. 작품명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될 수 없다(Human Dignity Shall Be Inviolable) >(2026)는 독일 기본법 제1조의 첫 문장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치당이 개보수한 건물 위에 이 문장을 새김으로써 이번 전시의 문제의식을 이미 예고한다. 실제로 자르디니 국가관 중에서 독일관만큼 건물 자체가 논쟁의 무게를 짊어진 곳은 없을 것이다.

1909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독일관은 원래 바이에른 또는 뮌헨 파빌리온으로 불렸고, 1938년 나치당이 파시즘 건축으로 전면 개보수했다. 히틀러 집권시기에 개축된 건물이 오늘날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독일관에 서는 작가들에게 하나의 질문이 된다. 이 건물 안에서 무언가를 전시한다는 것은, 그 역사와 어떤 방식으로든 대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3년 한스 하케(Hans Haacke)가 독일관 전시장의 대리석 바닥을 해체해 금이 간 콘크리트를 드러내어 공간 자체를 역사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2017년 건물 내부에 유리 구조물을 설치해 퍼포머들이 그 위아래를 동시에 점령하게 한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파우스트(Faust)»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성 티우는 건물을 해체하거나 비워내어 무언가를 제거함으로써 건물의 역사를 발언하곤 했던 이전의 작가들과 달리, 빼지 않고 오히려 더하는 전략을 취했다. 작가는 1987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1992년 어머니와 함께 독일에 망명했고, 베를린에서 처음 살았던 곳이 바로 게렌제 거리의 플라텐바우(Plattenbau) 단지였다. 플라텐바우은 당시 동독이 베트남과 모잠비크, 앙골라, 쿠바 출신의 계약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기숙사였다. 1인당 5㎡ 미만, 방 하나에 4인이 거주하던 곳. 동독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제연대를 표방했지만, 실제 조건은 달랐다. 노동자들은 도심에서 멀리 격리됐고, 독일 시민과의 접촉은 제한됐으며, 계약이 끝나면 추방됐다.

작가가 어린 시절 살았던 건물 복도에는 보호망도 쳐져 있었다. 네오나치들이 창문으로 화염병을 던진 이후 설치된 것이다. 2003년 이후, 해당 단지에는 퇴거 명령이 내려졌으며, 현재까지도 철거가 진행 중이다. 작가는 이 건물을 베니스로 가져왔다. 모자이크의 작은 타일들은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인근에서 제작되어 베니스의 전통 모자이크 기법을 따르고 있지만, 황금빛 성인이나 그리스 신화 대신 이민자 기숙사의 외벽이 그 자리를 채운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티우의 작업은 건축물에서 신체로, 집단의 역사에서 가족사로 이동한다. 어머니의 손과 발을 유리로 주조한 작품  <그러나 육체는 연약하다(But the Flesh Is Weak) >(2026), 그리고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1528년 인체 비례 연구를 기반으로 어머니의 신체 윤곽을 알루미늄 바로 배열한 <다양한 무게와 다양한 척도(Divers Weights and Divers Measures (Vũ Thị Hạnh / F I)>(2026)이다.

뒤러의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 인체를 수학적으로 측정하고 이상적인 비례를 정의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작가는 바로 그 측정의 언어로 자신의 어머니의 신체를 기록한다. 특히 <거짓 증언하지 말라(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Neck & Wrist Circumference, Version 4)>(2026)는 골상학의 논리를 직접 끌어 오는데, 골상학은 19세기에 등장한 유사과학으로, 두개골의 형태와 크기를 측정해 지능이나 인종적인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인종주의적 사고로 완전히 폐기됐지만, 당시에는 식민 지배와 인종 차별을 객관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권력은 배제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분류하고, 평가하고, 정의하는 체계를 통해 작동한다. 그리고 특정 신체를 기준 밖으로 밀어내는 메커니즘은 언제나 측정의 언어를 빌렸다. 작가의 어머니는 독일로 망명해 이민자 기숙사에서 살았고, 계약이 끝나면 추방될 수 있는 신체였으며, 국가 시스템이 분리하고 처리해온 수많은 이주민 신체 중 하나였다. 국가가 필요했던 것은 그녀의 노동력이었을 뿐, 그 신체를 가진 사람을 사회 구성원으로 상상하지 않았다. 작가는 배제의 도구로 쓰인 그 틀 안으로 어머니의 신체를 직접 가져옴으로써, 제도가 처리 가능한 대상으로만 대했던 존재를 제도의 한가운데 증인으로 세운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They Have Eyes, But They See Not, They Have Ears, But They Hear Not) >(2026)에서는 무당벌레 조각들이 벽을 점령한다. 무당벌레는 독일어권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동시에 이민자를 해충에 빗대어온 언어적 폭력의 역사를 끌어안는다. 행운과 혐오, 두 의미가 한 이미지 안에 공존하는 셈.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될 수 없다’는 모두에게 당연히 해당되어야 할 그 선언이, 전시장에선 그 문장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용히 되묻는다.

취향의 정치학

독일관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스케일로 칠해진 민트 색상의 벽면이다. 나우만은 구 동독 소련군 막사와 동독 전역의 공공 건물에 자주 쓰였던 색으로 전시장 내부를 덮었다. 그 배경 위로 농가의 미니어처 공예품, 총탄 구멍이 난 커튼, 훼손된 장식장, 열쇠, 장식용 무기 등이 설치되었다. 작가는 이 오브제들을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에 비유했다. 각각의 사물들은 독일 현대사의 특정 장면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 맥락을 모르면 그저 낡은 물건으로 보인다. 작가의 전략은 이 사물들이 품은 폭력의 역사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시장 내부를 ‘아늑하게 만드는(gemütlich machen)’ 역설적인 전략으로, 마치 독일 현대사의 잔해들이 거실 한편에 놓여 있던 일상적인 물건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자리하도록 했다. 폭력이 언제나 예외적인 사건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락한 공간에서 재생산되고 유지된다는 명제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다른 한쪽 벽에는 작가의 외조부가 1960년 경에 제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벽화를 추상화한 버전이 걸려있다. 외조부 칼 하인츠 야코프(Karl Heinz Jakob)는 당시 노동자들의 얼굴을 충분히 행복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에게 질책을 받았다. 그 얼굴들은 개인의 것이기 보다 집단의 표정을 위임받은 표면이자,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감정을 담아내는 권력의 윤곽이었다. 나우만은 이번 전시에서 그 표정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Henrike Naumann, The Home Front, 2026. Courtesy the Artist.

Henrike Naumann, The Home Front, 2026. Courtesy the Artist. | © Jens Ziehe, Berlin

드레스덴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 나우만의 관심사는 줄곧 취향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가였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동독의 일상에서의 일테리어가 어떻게 사회주의 집단성을 물질화했는지, 그리고 통일 이후 그 공간이 어떻게 극우적 정서의 온상으로 전환됐는지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그렇기에 1990년대는 단순한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작가의 표현처럼 오늘의 독일을 만든 ‘고고학적 선사(archäologische Vorgeschichte)’이며 [1], 그 시대의 소파와 장식장, 커튼 또한 특정한 정치적인 감수성을 형성하고 순환시키는 매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녀의 작업은 형식적으로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이전까지 주로 보여줬던 3차원 공간 설치에서 벗어나 작업이 벽면 부조로 납작해졌다. 특정 시대의 실내 공간을 통째로 소환하던 방식이 추상적인 기호체계로 변환된 데에는 동독의 역사는 서독의 서사 안으로 단일하게 편입됐다는 문제의식을 내포한다. 복잡하고 입체적이었던 동독 주민의 삶이 실패의 서사로 납작해진 것이다. 작가가 ‘세컨핸드 재교육(Secondhand-Re-Education)”이라 부르는 개념도 이 맥락에서다. 1989년 이후 서구는 사회주의의 붕괴를 역사의 완성으로 선언했고, 동독 출신들은 그 서사 안에서 재교육받아야 할 존재로 위치 지어졌다. 이번 전시의 오브제들은 그 과정에서 버려지거나 흡수되거나 뒤틀린 것들의 잔해 목록에 가깝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번에는 슈타지보다 훨씬 정교하게.”[2] 1991년 동독 시민운동가 베어벨 볼라이(Bärbel Bohley)는 통일 직후, 슈타지의 감시와 배제, 침묵을 강요하는 논리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35년이 흐른 지금, 독일관에서 하나의 예언으로 자리한다.[2] 전시 제목이 가리키는 ‘폐허’는 단순히 무너진 건물 터가 아니다. 티우가 격리된 신체들 곁에서 집한 것도, 나우만이 취향의 문법 속에서 발견한 것도, 결국 완결되지 않은 채 지금 여기까지 이어진 어떤 붕괴의 진행형이다.

다른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 독일관을 돌아봤다. 파사드 위 이미지가 더욱 또렷이 보였다. 어렴풋하던 낡은 아파트 외벽도,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단지로 눈에 들어왔다. 어느 것 하나 같지 않은, 수십만 개의 타일이 모여 만든 하나의 집단. 볼라이가 말한 것도 어쩌면 그렇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너무 가까이, 아주 자연스럽게.


글: 박은지
기획: 신소희
영어 번역: STAR Korea AG
독일어 번역: Leslie Kla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