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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981
문화활동과 사회정책

게오르크 레히너 전 주한독일문화원 원장(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1980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국제 심포지엄 한국인 참가자들과 함께
게오르크 레히너 전 주한독일문화원 원장(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1980년 서울의 한 호텔에서 국제 심포지엄 한국인 참가자들과 함께 | 사진: 게오르크 레히너

게오르크 레히너는 1978년 12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주한독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이 역동적인 시기에 했던 활동들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과의 인연을 레히너 전 원장이 소개한다.

40년 전 나의 다섯 번째 파견지였던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문학, 조형 미술 등 문화의 중요요소라고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진행했던 일들은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미 개발정책 분야의 새로운 지속가능한 활동 형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당시에 나는 장애어린이들의 사회적응을 돕기 위한 재단 '햇빛 활동(Aktion Sonnenschein)'을 설립한 테오도르 헬브뤼게(Theodor Hellbrügge)와 그의 팀의 도움으로 한국의 장애인 교육 분야에서 이와 관련된 활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독일에서 여러 차례 개최된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개인전 포스터 1981년부터 독일에서 여러 차례 개최된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개인전 포스터 | 사진: 게오르크 레히너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 한국의 윤이상, 강석희와 같은 작곡가들이 서구의 음악과 한국 고유의 전통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만든 풍성한 작품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독일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활동한 윤이상을 후에 프랑스의 공영라디오 방송 라디오 프랑스(Radio France)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석희에게는 주한독일문화원에서 밤에 방해받지 않고 작곡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강석희가 나에게 심포닉 시 '메가멜로스(Megamelos)'를 헌정해주었던 일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후에 잘츠부르크 주립발레단 단장을 역임하기도 한 프레드 마르티니(Fred Marteny)는 한국 국립발레단의 발레 마스터로 오랜 기간 재직하며 '골렘(Golem)'의 안무를 제작하기도 했다. 오늘날 독일에서 저명한 김영희 인형작가를 수년 동안 지원했던 일은, 김영희 작가가 후에 독일인과 결혼하고 자녀들이 법률가, 패션 디자이너, 피아니스트로 한국과 독일에서 이름을 떨치는 인물들로 성장했다는 의미에서 더욱 뜻 깊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한국 영화는 당시에는 아직 이러한 발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시절 한국에서 재직하는 3년 동안 한국 영화의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임기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면서 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의 무거운 35mm 필름 복사본을 직접 들고 가서 베를린 페스티벌(Berliner Festspiele)에 전하기도 했다. 10년 후에는 배용균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큰 주목을 받았다.

김광규 시인이 게오르크 레히너 전 원장에게 전하는 헌정글 김광규 시인이 게오르크 레히너 전 원장에게 전하는 헌정글 | 사진: 게오르크 레히너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큰 관심을 받았으며 독일 출판사 주르캄프(Suhrkamp)에 의해 작품이 출간되었던 한국의 젊은 시인 김지하와의 인연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나의 관심을 더욱 키웠다. 그는 '오적'이라는 작품 때문에 6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김지하 시인이 석방된 직후 추운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눈 쌓인 한 마을로 그를 찾아가 만났을 때,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감생활로 인해 몸이 굽은 모습이었다. 고은 시인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김광규 시인과의 친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그의 시 '안개의 나라'를 나는 독일어로 옮기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재직 기간 동안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한국의 문화적 상황 깊숙이 관여하며 사회정책적 및 사회비판적 참여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는 '문화를 찾아서(Auf der Suche nach Kultur, 2004년, 베를린 로토스 출판사)'라는 나의 저서에 기술되어 있다.
 
“그 시절 한국에서 내가 벌였던 정치적 저항 사례 세 가지를 소개하겠다.
 
당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이끌던 두 한국인은 여러 차례 업무를 중단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우리는 이를 따르지 않아 체포될 위기에 놓인 이들을 나의 집에 숨겨주기로 했다. 집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에게는 이들이 대구에서 온 글을 쓰는 교사들이며 소설 집필을 위해 잠시 올라와 있는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남자와 여자였던 이 둘은 집에 남아 있던 유일한 빈 방 하나를 같이 사용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 후 이들은 연인이 되었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위해 농사를 지으며 돈을 벌면서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냈다. 이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과 더불어 특히 노동조합들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래서 유신헌법은 28조와 29조에서 노동조합의 파업 활동을 금지했으며, 노동조합법 역시 12조와 16조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했다. 이러한 국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1979년을 비롯해 계속해서 불법 현실 속에서 노동자들의 살아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한 대규모 시위들이 일어났다. 대기업 해태에서 여성들이 영하 40도에 달하는 얼음공장에서 장갑도 제공받지 못한 채 일을 했던 상황은 당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나의 또 다른 경험을 소개하겠다. 그 시절 반정권적 생각을 가지고 있던 많은 대학생들은 숨어 지내며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자기 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새로이 수립된 녹색당이 열심히 논하던 주제인 원자력의 위험에 관한 독일어 서적들의 한국어 번역을 하는 사례로 이러한 학생들을 도왔다. 또한 반정권적 세력에 대한 고문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전단지 제작을 도왔다. 한 연세대학교 학생은 시위를 하던 중 대학 건물에서 이 전단지 수백 장을 날리며 투신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한국의 첩보기관이 비밀 요원을 우리 그룹에 잠입시켰고 마치 TV 범죄수사물에서처럼 내가 한국 중앙정보부에게 잡혀갈 뻔 한 적이 두 번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한국 가족 중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을 이끌었던 적이 있는 한 사람도 그 시절에 심한 고문을 당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휴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나 역시도 10여 년 동안 한국 첩보기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것 같다. 후에 한국에 입국할 때면 이를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한국민속촌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필자의 모습 1979년 한국민속촌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필자의 모습 | 사진: 게오르크 레히너 나는 가택연금 중인 김대중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이야기해주며 '이후 시기'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두 차례의 정치적 암살 시도에서 벗어났던 그에게서 나는 야권의 희망을 보았고, 그래서 지인들을 통하여 독일의 사회민주당 정부에게 그가 처한 상황을 알렸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전총리의 개인 서한을 전해주기도 했으며, 정치인 힐데가르트 함-브뤼허(Hildegard Hamm-Brücher)와 그라프 람프스도르프(Graf Lambsdorff)의 도움으로 독일 정부의 공식 방한 때 정부간 대화에서 김대중의 운명이 여러 차례 다뤄졌다.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 힘 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민주주의 체제 국가의 대통령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자신과 그 주변인들에게 큰 보상이 되었다.
 
김대중 이전의 두 대통령, 부정부패를 저지른 전두환과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후에 사면 결정이 내려진 일은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아시아 '민주주의'의 불합리한 모습이라고 여겨진다. 그 사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공로도 정치의 일상적 사안들에 묻힌 것 같아 나는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결연함과 용기를 애수에 젖어 회상해 본다.
 
1980년 정권에 저항하던 김대중의 사형 판결에 대해 항변했던 것은 독일 대사관이나 독일 정부가 아니라, 망명자들을 돕는 일에 힘을 썼던 쿠르트 샤프(Kurt Schaf)  베를린주의 주교와 같은 용감한 비판가들이었다. 같은 해 12월 4일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는 '대사는 오랫동안 그냥 가만히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현정권에 대한 저항활동을 하며 '문화활동이라는 것이 정치적 현실을 배제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내가 '서울에 주재하는 독일기관 내에서 이상한 불평가'로 여겨졌음을 보도했다.
 
괴테 인스티투트와 그 한국 지부인 주한독일문화원이 그 후 이러한 활동을 교훈으로 삼지 않고, 특히 북한과의 관계 및 평양 내 독일 문화기관의 설립과 관련된 '문화적' 활동에 있어 현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오판을 내리고 있는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명예롭지 못하며 여전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한국과 함께 나만의 길을 걸어왔고 35년 째 한국인과 결혼 생활을 하며 바이에른 가족과 한국 가족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나는 독일인 아들이 있고, 나와 한국인 아내 사이에 두 명의 자녀가 있다. 독일과 한국은 분단이라는 운명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두 가족 역시 우리만의 운명적 공통점을 이루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