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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칼럼 ‘언어를 말하다’
조심해, 전문용어다!

일러스트: 다양한 도표가 있는 프레젠테이션 앞에 있는 사람
‘복잡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왜 간단하게 표현하는가?‘라는 태도로 보인다. | © 괴테 인스티투트/일러스트: Tobias Schrank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목적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스나인 카짐은 그렇게 생각하며 따라서 많은 전문용어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때로는 번역만이 유일하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나는 언어적 다양성의 팬이다. 방언과 사투리, 지방별 표현방식과 지역에서 쓰는 용어들을 좋아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고 종종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에 즐거워한다. 그리고 언어란 창조적인 물질이다.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형성하고, 언어를 다채로운 방법으로 활용하며, 기분과 감정을 표현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거나 감출 수 있다. 화가에게 물감이 있다면, 작가에게는 언어가 있다.

그러나 전문용어와 마주하면 나의 열정도 한계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의사가 나에게 “우측 원위 요척골 관절에 염좌와 외전 외상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오른쪽 팔꿈치가 삐어서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그 언어 때문에도 고통스럽다. 물론 모든 의사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는 그렇게 한다. 왜 그러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구분하는 미사여구

물론,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전혀 빠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상대방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단어를 고르는 것은 친절이자, 상대를 존중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사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가끔씩 잊는 듯하다. 어쨌든 다시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긴 하다. “과다각화증, 즉 표피의 과각화증을 가능한 한 빨리 각질용해제로 치료해야 합니다.” “네?” “자, 여기 이 반창고를 티눈에 붙이세요.”

복잡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왜 간단하게 표현하는가? 내게는 이런 태도라고 보이고 나도 이를 알고 있다. 나는 몇 년간 해군으로 복무했는데, 독일 연방군, 특히 해군에서는 고유한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해군 선박의 밧줄을 밧줄(Seil)이라고 하는 것은 해군을 잘 모르고, 소속되지 않았으며,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뿐이며, 해군에서는 이를 로프(Tampe)라고 한다.

해군 언어는 군대의 언어와 선원들의 언어가 혼합된 것으로, 전문용어의 정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해군에서는 누군가에게 경고할 때 ‘주의!(Vorsicht!)’라거나 ‘조심!(Achtung!)’이라고 하는 대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와 같은 표기를 쓰는 ‘경계!(Warschau!)’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 밧줄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친절하게 주의를 주는 말은 ‘로프 경계!(Wahrschau Tampen!)’다. 처음에는 왜 계속 폴란드 수도를 외치는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경계(Wahrschau)는 중세 저지 독일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warschuwinge’는 ‘경고(Warnung)’를 의미한다. ‘경계(Wahrschau)’의 ‘H’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튼 그 단어에 들어있는 건 맞다. 다시 확인도 해 보았다.

어쨌든 나의 해군 동지들과 나는 다른 이들과 구분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군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전문용어는 청소년 은어나 보통 모든 특정 그룹에서 사용하는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소속감과 동질감을 나누려는 목적을 가진다. 형제여,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자매여, 우리는 같은 주파수로 소통하고 있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정교한 언어 코드를 통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쿨하고 잘 알며 우월한지를 보여준다.

너무 많은 ‘긴장의 장’

대학에서는 이런 은어에 빠지는 일이 특히 만연했는데, 나의 경우에는 정치학이었다. 언어란 그 얼마나 인위적으로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던가! 가장 진부한 사실, 가장 단순한 연관성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90%의 시간을 써야 하는 용어들로 장식되었다. 똑똑하게 들리는 것은 적어도 똑똑한 내용으로 글을 쓰는 것만큼 중요했다. 여기서 후자가 빠져 있으면, 전자에 혹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것을 ‘학술적’이라고 한다. 그 반대는 ‘저널리즘적’으로, 즉 모두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학술 텍스트에서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전문용어는 분명 자신이 학문적으로 교육받은 정치학자 계급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나는 특히 이 세상의 정말 모든 주제를 ‘A와 B 사이의 긴장의 장에 놓인 C’라는 제목으로 압축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동맹 방어와 집단 안보 사이의 긴장의 장에 놓인 나토(NATO)’, ‘서방과의 결합과 동유럽 통합 사이의 긴장의 장에 놓인 연방정부’, ‘가짜 지성주의와 학자 지망생 사이의 긴장의 장에 놓인 어리석은 표현들’. 한번 시도해 보기를! 항상 잘 맞는다!

그 밖에도 거의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마치 모두가 그 인용구를 안다는 듯이 행동하여 자신이 지식 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도 있다. ‘크레이그 마츠키에비치(Craig Moraciewicz)가 최근 그에 대해 쓴 …’라거나 ‘레토 부르쉴함머(Reto Burschlihammer)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는 식이다. 또는 지성의 대가의 이름을 덧붙여서 그들의 빛이 자신의 지성을 약간 비추게 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이름이 나올 때 ‘위대한 한나 아렌트에게 모든 경의를 표한다’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항상 믿을 수가 없다.

다르게 표현하기

이 정도면 그렇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무원, 법조인, 사업가, 정치인이 일부러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불쾌하다. 관청의 서류, 공증인을 대할 때, 구매 계약서에 작게 인쇄된 글씨들, 정치인들의 일부 강연에서 나는 가끔씩 그들이 내가 이해할 수 없게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해했다면 서명하고, 구매하고, 투표하지 않았을 것들에 서명하고, 구매하고, 투표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전문용어는 나에게 그들이 나를 속이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전문용어를 번역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자신이 더 나은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면 나는 문서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국어 선생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이해할 수 있게 써 주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돌려보낸다. 그러면 가끔씩 전화로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 주는 경우가 있다. “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쓰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면,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언어적 단순함과 명료함이 언어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지하 구근작물의 수확량 규모는 영농인의 지적 역량과 역상관한다’는 똑똑하고 세련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바보 같은 농부가 가장 큰 감자를 수확한다’가 훨씬 아름답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언어를 말하다 – 언어학칼럼

본 칼럼 ‘언어를 말하다’는 2주마다 언어를 주제로 다룬다. 언어의 발전사, 언어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언어의 사회적 영향력 등 문화적, 사회적 현상인 언어를 주제로 한다. 언어 전문가나 다른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관심 주제에 대해 6개의 기고문을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