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청력을 상실한 공상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청력이 점점 더 약해지기 전에 베토벤은 사교 행사에서 연주를 하곤 했다.(율리우스 슈미트(1854년~1935년)의 그림 복제: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베토벤’) | 사진(부분): © picture alliance/akg-images

베토벤이 청각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장애를 딛고 계속해서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그는 어떤 전략을 펼쳤을까?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을 맞이한 지금, 학계에서는 그가 앓았던 질병의 원인과 그것이 미친 영향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28세가 되던 해부터 이미 청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청력이 완전히 소실된 것을 한탄해야 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작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이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에게는 기적에 가까운 일로 여겨진다.

2020년은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이번에 그의 업적과 삶의 모든 측면, 그리고 특히 그가 앓았던 청각 장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 시대의 독보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베토벤은 점점 악화되는 병세로 인해 직업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그로 인한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이미 32세에 작성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 “내가 죽자마자” 청각 장애에 수반되는 상황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려 “내가 죽은 후에 세상이 나와 가능한 한 많이 화해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주치의에게 요청했다. 극심한 감정 기복에도 시달렸던 이 천재와의 의사소통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러한 화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울부짖거나 오랫동안 혼잣말을 하기도 했으며 과도한 음주에 빠져들었다. 또, 다른 여러 질병까지 더해져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세계를 그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시도: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 사진(부분): © picture alliance/akg-images

질투심 많은 악마가 끔찍한 장난을 치다

음악가 베토벤이 정확히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오늘날 알 수 있는 방법은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이나 서신, 기록 등을 통해 그것을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1801년, 31세가 된 베토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들을 편지에 적었다. “질투심 많은 악마가 내 건강에 끔찍한 장난을 쳐놓았다. 내 청력은 3년 전부터 자꾸 약해져만 가고, 귀에서는 밤낮 할 것 없이 윙윙, 웅웅 소리가 난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어 모든 사회생활을 피해 왔다. 내가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음악가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악기와 목소리가 내는 높은 음을 듣지 못하고, 오케스트라의 관악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회자의 말이 들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면 견딜 수가 없다.” 한스-페터 첸너(Hans-Peter Zenner) 이비인후과 명예교수는 이를 두고 “고음역대 및 말 명료도 청력 손실에 따른 난청, 이명, 왜곡 및 청각 과민, 즉 소리에 대한 과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베토벤의 고통을 치료할 수 없었다”라는 그리 놀랍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베토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했다.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질병: 베토벤은 자신의 질병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했다.(루돌프 A. 회거(1876년~1928년)의 그림: ‘공원의 베토벤’, 캔버스에 유채) | 사진(부분): © picture alliance/akg-images
내이에 있는 미세한 유모 세포는 조용한 음향 신호를 가청 범위에 속하도록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와우 증폭기). 베토벤의 증상을 보면 내이의 미세한 유모 세포를 통해 더 이상 선명한 주파수 이미지를 얻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내이 청력 상실(이경화증)은 오늘날 치료를 통해서, 또는 보청기 삽입이나 이식술 등의 방법으로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베토벤은 귀에 아몬드 오일 방울을 떨어뜨리고 고추냉이를 적신 솜을 넣는 고통을 견뎌야 했고, 심지어 미지근한 도나우 강물로 목욕을 하라는 아무 소용 없는 처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청력이 해가 갈수록 상실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1812년까지 9개의 교향곡 중 8곡,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 및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청각 장애가 없었더라도 베토벤은 베토벤이었을까?

베토벤의 청력 상실이 그의 작곡 활동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두고 학계 내부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1,568헤르츠의 주파수에 해당하는 G6음보다 높은 고주파 음역대를 사용한 빈도가 줄었다는 점에서 청력 소실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고음을 베토벤은 점점 더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동 중반에 작업한 작품을 보면 그는 중간 주파수 범위의 음역대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182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의 후반 작품들에서는 그가 내면의 청각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전체 음역대를 모두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정반대의 경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한계를 극복하는, 그의 작곡 활동이 갖는 내적인 규칙성에 의해서만 그 엄청난 음악의 창작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의 청력이 그대로였다면 어땠을지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내던져졌다.
예술가는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내던져졌다: 베토벤은 교향곡 제6번 F장조 68번 작품을 작곡할 때 이미 심각한 청력 상실을 겪고 있었다.(작가 미상: ‘물가에서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는 베토벤’, 컬러 석판화, 1807/08년). | 사진(부분): © picture alliance/akg-images
하지만 난청이 실제로 음악 천재 베토벤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 지휘자이자 피아노 거장이었던 베토벤에게 이 활동이 불가능 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오른 것은 1814년이었다. 그 후 그는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나 혼자 있을 때에만 피아노를 쳤다. 1818년부터 베토벤과의 대화는 오로지 서면으로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약 400권의 대화록이 남겨졌다. 말하자면 베토벤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하노버 음악연극미디어대학교의 역사 음악학자인 로렌츠 루이켄(Lorenz Luyken) 교수도 베토벤이 ‘장엄 미사(Missa Solemnis)’에서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 자신을 보여주었듯, ‘본래의 모습에서 공상가로’ 변화한 것은 청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 베토벤과 그의 삶의 질을 생각하면, 의학의 발전 그리고 그의 고통을 완화해 줄 수 있는 오늘날의 방법들이 당시에 있었다면 분명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그의 혁명적인 작품 대다수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베토벤 전기를 쓴 얀 카이어스(Jan Caeyers)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보면 그의 삶의 개인적, 사회적 비극도 하나의 기회였고, 베토벤은 뜻밖의 음악 세계를 탐험하는 데에 그 기회를 활용했다.”